승무원을 그만두고 4년 만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팁을 냈다.
아직 2시간이나 남았지만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해 줄게.
남편이 출근한 뒤 런던에 적응할 겸 아기와 함께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분위기 좋은 카페인 The wren coffee.
세인트 폴 대성당 근처에 있는 이 카페는 주말에는 미사를 드리는 성당으로, 평일에는 주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카페로 변한다.
방문했을 당시 다행히 카페는 한산했고 이때를 이용해 영어 한 마디라도 더 써보려고, 한 마디라도 더 들어보려고 직원과 이야길 나눠보았다. 그러다 뻔히 쇼케이스에 없는 걸 알면서도 샌드위치 있냐는 질문 한번 던졌는데 오히려 친절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음, 우리가 12시부터 식사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판매하긴 하는데 널 위해 먼저 준비해 줄게.
예상치 못한 친절이었다. 심지어 샌드위치 종류를 읊어주더라도 못 알아듣는 날 위해 베지테리언인지 아닌지, 알레르기가 있는지 아닌지 하나씩 물어보면서 같이 샌드위치를 골라주었다. 그렇게 나는 플랫화이트 한 잔과 치킨 파니니 그리고 샐러드를 주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제의 시간. 그동안 런던에서 들린 식당은 알아서 팁이 15%가 붙어 나와 임의로 팁을 주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결제하는 과정에 팁을 임의로 선택하는 것은 무척 생소한 순간이었다. 심지어 눈에 확 들어오는 NO TIP. 팁을 주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비싼 영국 물가에 항상 15%씩 붙어 나오던 팁 때문에 아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팁을 안 줘도 되다니. 순간 갈등이 되었다. 그런 나의 갈등을 알아챈 것일까. 친절하게 응대하던 직원이 갑자기 카운터를 비웠다. 마지막까지도 참으로 친절한 직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영국에서 처음으로 내 의지로 팁을 주었다.
성스러운 분위기의 카페 내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문득 나의 승무원 시절이 떠올랐다.
승무원이 되고 처음으로 해외로 나갔던 곳은 하와이였다. 신입 때는 선배와 같이 한 방에 지내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곤 하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호텔을 이용함에 있어서도 에티켓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음식물이 묻는 용기를 버릴 때는 벌레나 쥐가 들끓을 수 있으니 봉지에 묶어서 버린다거나(실제로 나는 승무원 시절 호텔에서 종종 큰 생쥐를 보았다.) 다 쓴 수건은 화장실 욕조에 갔다 둬야 한다 등 일일이 열거하기엔 사소한 것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생소했던 건 방 청소하는 직원을 위해 팁을 놓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룸서비스를 시킬 때도 마찬가지 었다.
현지 돈으로, 혹은 달러로 2달러 정도는 항상 호텔 방에 두고 체크아웃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나는 승무원을 그만두는 순간까지 항상 지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해외에 나와서는 팁을 주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15~20% 정도의 팁은 무조건 줬다.
그렇게 내 의지인지 아니면 ‘런던에서처럼 저절로 붙어 나오던 팁과 같이’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지 모른 채, 자연스레 팁을 주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신혼여행 때 처음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발단은 이러했다. 신혼여행으로 파리에 갔을 때 남편과 나는 식당에 팁을 얼마를 주느냐로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평소처럼 15~20%는 줘야 한다 주장했고, 일본에서 온 그는 팁을 그렇게까지 많이 줘야 하냐며 불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여행의 중반 무렵, 워킹투어로 만난 가이드가 던진 한 마디가 파문을 일으켰다.
팁은 음식 가격과 상관없이 한 2유로 정도만 줘도 충분해요.
은행원인 남편은 그동안 우리가 팁으로 낸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식간에 계산하며 앞으로 팁으로 2유로만 낼 것을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그동안 승무원으로 해외를 돌아다니며 내는 팁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지 가이드도 이렇게 말하는데 왜 선배들은 항상 팁을 그렇게 내야 한다고 했던 거지?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번에는 승무원으로 파리를 또 방문했다. 고된 비행을 마친 후 친한 선배님과 맛있는 와인 한 잔과 식사를 마친 뒤 아는 척하며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배님, 제가 여기 현지가이드한테 들었는데요. 여기 가격과 상관없이 팁은 2유로만 주면 된대요.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선배님도 팁을 아낄 수 있는 것에 기뻐하며 당연히 2유로만 팁으로 줄거라 생각했다. 해서 부러 아는 척 선배님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선배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알아. 그래도 우리가 승무원이라면 이렇게 줘야 해.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이런 행동들이 쌓여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거든.
나는 신입 때부터 자연스레 팁을 주는 것을 학습, 아니 세뇌를 시키는 것이 이러한 이유였음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회사 차원에서 이러한 문화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승무원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문화를 지켜나간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승무원이 민간외교관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 살짝 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내 의지로 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던가. 일본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팁과 거리가 먼 삶을 살던 나는 팁으로 15%가 적힌 영수증을 보면서 아까워지더라. 그러니 내 의지로 오랜만에 팁을 낸 이 순간이 승무원 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순간을 기록하기로 했다.
런던에서 처음으로 팁을 낸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