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지도 해안공원(辻堂海岸公園)
갑자기 핸드폰 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사진도 필름 카메라도 찍고 싶었다. 거리를 헤매는 순간도 보정할 수 없고, 맛있게 나온 음식을 더 맛있어 보이게 보정할 수 없는, 날것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
목적지조차 정확하지 않은 그런 무책임한 여행, 그러나 여행 규칙만 정해져 있는 기묘한 여행.
나는 일본에 온 지 9개월 만에 나 홀로의 아날로그 여행을 기획했다.
버스는 몇 번을 타야 하는지, 주변에 어떤 맛집이 있는지, 무엇을 사야 가성비가 좋은지, 전혀 알 수 없는 여행. 그리고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고, 찍고 또 찍어서 보정하고, 보정하고 또 보정해 완벽한 사진을 자랑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여행을 기획했다.
우연히 발길이 닿아 츠지도 역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싶다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 불안했기에 여행 떠나기 전,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할지, 어떤 버스노선을 타야 할지 정도는 조사하고 출발했다.
도착하니 생각 외로 정보가 더 없었다. 덩그러니 나 홀로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남들에게 목적지를 맡겨보자.' 무책임한 여행에 걸맞게 타인의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따라가 보니 대형 쇼핑몰이 나타났다. Terras Mall. 4층의 큰 쇼핑몰 안으로 역에서 쏟아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갔다. 나 또한 바다를 보고자 츠지도에 왔지만, '배가 고프니까...'라고 변명하며 쇼핑몰에 홀려 들어갔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곳은 어딜까, 어디가 가장 분위기가 좋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나름 꼼꼼히 골라보았다. the cafe toasty's. 테라스가 있는 화이트톤의 브런치 카페였다. 음식이 나오면 환호성 지르며 사진 찍기 바쁜 그런 곳이었고, 일본도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알려준 곳이기도 하다.
예쁘게 세팅된 음식 앞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고사를 지내야 음식 맛이 더 돋는 줄 알았는데,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먹는 동안 핸드폰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음식을 음미하는 것 밖에 없었고, 소여물 씹듯 씹고 또 씹은 후에야 넘겼다.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은 핸드폰을 대신해 볼만한 것을 찾았으며, 이내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꽤나 재밌다는 걸 알아챘다. 홀로 식사하며 핸드폰을 보고 계신 노년의 숙녀분, 더운 듯 쿨링 시트로 온 몸을 닦아대는 중년의 숙녀분들, 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이야기하기 바쁜 젊은 숙녀분들. 레스토랑 안에는 다양한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이 시간에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며 부러워하기 바빴겠지. 현실은 여기 있는데.
식사를 마친 후, 목적지 또한 잃어버렸다. 바다를 본다는 계획은 저 멀리 날아가고, 쇼핑몰을 구경하기 바빴다. 핸드폰을 시계로 대체한 지가 꽤나 오래전이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지 못한 채 쇼핑몰 망령이 되어 혼을 빼놓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발이 시계 역할을 대신해줘,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걸 통증으로 알려주었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본래 목적지였던 바다를 찾아 나섰다.
쇼핑몰로 가는 길은 그리 쉬웠는데, 바다를 향해 가는 길은 왜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니, 나는 되돌아온 역에서 미아가 되어버렸다. '바다를 가고 싶은데, 가는 방법을 모르겠어.'
겨우 찾은 안내판에는 버스정류장 위치만 겨우 표시되어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발품 팔며 내가 타야 할 버스를 찾는 것이었다. 식사하며 심심했던 것, 쇼핑하며 몇 시인지 몰랐던 거 다 괜찮았는데, 길 모르는 건 괜찮지 않았다.
겨우 찾은 버스정류장. 에노덴 버스를 타면 츠지도 해안공원 앞까지 간다고 하는데, 확신은 없고 불안함만 있었다. 표지판에서 가만히 서 있으니 역무원이 슬금슬금 오길래 물어볼까 말까를 한창을 고민하는 와중에 버스가 왔다.
'운명에게 맡기자.' 불안하지만 버스에 올라타, 어딘지 모를 곳을 내려준다고 해도 그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했다. 핸드폰 하나 없을 뿐인데 나는 운명론자가 되어 목적지를 하늘에게 맡겼다.
버스 창 밖을 미어캣처럼 경계 어린 눈으로 살펴보니, 바다와 점점 가까워짐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도착한 바다. 버스정거장에서부터 바다내음이 물씬 풍겼다.
처음 보인 건 푸른 하늘, 다음으로 보인 건 검은 모래사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인 건 하얀 파도가 치는 바다였다. 평일이라 그런가 사람도 몇 없는 것이 오히려 속 시원하게 다가왔다.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에노시마. 서핑을 즐기는 서퍼. 강아지와 산책하는 부부. 해안가를 따라 러닝 하는 운동부원. 사진 찍고 있는 소녀. 일본 영화 한 편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한창 구경하다 보니, 이제 할 것이 없어졌다. 바다는 왔고 해는 아직 한창인데, 나는 할 게 없었다. 근처에 볼 만한 곳이 있을까 찾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었다. 여행을 왔다면 알차게 보내야 하는데, 알차게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뭘 해야 하지?' 생각의 꼬리를 물다 물다, 머릿속은 결국 엉망이 되어 버렸다. 과부하 된 핸드폰이 갑자기 멈추는 것처럼, 나도 모든 것을 멈추고 멍 때리기 시작했다.
발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내 발까지 올까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시작으로 하얗게 물보라 치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요즘 불멍이 유행한다더니, 파도 멍도 꽤나 재밌는 놀이었다. 파도는 매번 크기와 형태가 달라 신선했다. 파도소리와 바닷바람이 한 세트로 곁들여지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시각, 청각, 촉각 모두가 충족되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머리는 이내 답을 내렸다. '다음번에는 돗자리를 챙겨 오자.' 그때 나는 이미 굴러다니는 나뭇조각을 구해 엉덩이에 깔고 앉아 바다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엉덩이가 불편한 것이 돗자리만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렇게 바다를 보며 멍 때리다 해가 슬슬 지는 듯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길에 츠지도 해안공원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길래 당황했다. 내가 간 곳이 공원이 아녔던 것인가.
버스정류장 이름이 '츠지도 해안공원 앞'이길래, 눈앞에 보이는 바다가 해안공원인 줄 알았는데 공원이 따로 있었다. 생각보다 큰 공원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많아 공원 안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무리가 많았다.
파도와 함께 깨끗하게 씻겨 내린 내 머릿속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만 들었다.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다. 나도 재미나게 놀 수 있는데...' 어른이 되면 그네가 갑자기 재미없어지고, 미끄럼틀에 갑자기 흥미가 떨어지는 법칙이 있는 건가. 그런 법칙이 진짜 있다면, 어느 순간 그네가 재미없는 척, 미끄럼틀은 싫어하는 척했던, 법칙을 따르는 척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공원 한 편에 있는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다.'
그렇게 부러운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다 보니 어느새 하늘에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여전히 시간은 모르겠지만, 해가 지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생각해보았다. 이번 여행은 어땠는지. 그러나 이번 여행은 모르겠다. 여행의 시작은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마음이, 여행의 끝에는 이 여행이 얼마나 알찼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확실한 건 다음 여행에 나는 돗자리를 챙겨갈 것이고, 발이 덜 아픈 신발을 신고 갈 것이다. 그리고 핸드폰은 여전히 들고 가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 충실한 여행을 즐겼고 남는 것은 없지만 마음에는 남는, 그런 여행을 했다. 나는 이 아날로그 여행이 꽤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앞으로도 이어나갈 생각이다. 그럼, 다음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즐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