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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Mar 09. 2022

하루 세번 에티오피아를 향해 절하겠습니다.

내가 좋아 하는 것 1: 커피

  첫 경험이 또렷이 기억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나에게 그중 하나가 바로 커피, 에스프레소 음료이다. 때는 한창 멍청할 나이 20살. 장소는 학생회관 2층 이디야 카페. 그때 나는 멍청하면서도 허세까지 부리고 싶었다. 컨셉은 ‘이런 쓰고 비싼 커피를 늘 상 마시는 이 도시의 차가운 대학생’. 그래서 나의 평소 루틴이라도 되는 냥, 자연스럽게 (제일 싼)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받아본 커피는 큰 종이컵 안에 초라하게 몇 스푼 들어 있지도 않은 검은 액체였다. 좋은 커피 향 사이로 느껴지는 악마 같은 쓴 향,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꺼먼 색깔, 그리고 초라하게 들어있었지만 꽉 차 보이는 걸쭉함까지.


  ‘겨우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처음 번졌지만, 곧바로 나의 본능은 ‘비상! 이걸 마시면 난 죽는다.’라는 생각이 뒤 따라왔다. 그래도 나는 친구들 앞에서 교양 있는 지식인. 한적한 오후 티타임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코쟁이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시킨 이 커피에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액체와 입을 맞추었다.


  석유를 먹어본 적 없지만, 처음 먹어본 에스프레소의 맛은 정확히 석유와 일치했다. ‘으웩’ 외마디를 외치며 몽땅 뱉었다. 도대체 이런 아스팔트 달인 물을 왜 마시는 거지? 하지만 그 커피를 몽땅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몇 번을 더 혀를 고문했다. 결국 다 마시기는 했지만 이 쓴 물은 나랑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어른, 지식인, 교양인의 맛이구나 싶었다.


  그런 첫 쓴 경험을 했지만. 여타 한국 드라마, 최악의 상황에서 첫 만남을 가진 남주와 여주처럼. 나와 커피는 사랑에 빠졌다. 지금의 나는 아침에 “커피!”라고 외치며 일어나며, 일 시작할 때 커피 한 잔, 밥 먹고 한 잔, 운동하기 전에 한 잔. 지금도 이 글 쓰면서 두 잔째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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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본격적인 커피 사랑은 남미 여행 중 들렀던 콜롬비아 Salento살렌토에서 시작했다. 콜롬비아를 오면 다들 한 번씩 한다는 커피 농장 투어. 거기서 처음으로 커피가 오묘한 맛을 가진 음료란 걸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커피를 따고, 까고, 말리고, 로스팅까지 경험해보았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마신, 농장 직원에 의하면 커피 농장에 있는 사람들이 마시려고 몰래 숨겨둔 최상의 원두로 내렸다는 그 커피는 그 설명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맛있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에는 살짝 달았고, 중간에는 셨으며, 나중엔 기분 좋게 썼다. 커피가 맛있는 거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비로소 취향의 경지, 사치의 경지, 기꺼이 이 맛을 위해 돈을 더 써도 좋은 경지에 그렇게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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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으니 좋아하게 되었고, 좋아하다 보니 나의 취향도 알게 되었다. 나는 허니 프로세싱을 거친 커피를 좋아한다. 허니 프로세싱은 커피콩을 말리는 과정 중 껍질만 제거하고 말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커피콩을 말리면, 원두에 커피 과육의 단맛이 어느 정도 베이게 된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원두는 하와이안 코나. 하지만 너무 비싸니 시티 로스팅에 어울리는 허니나 내추럴 원두면 다 좋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어느새 좋아하는 부분이 생기고, 좋아하는 부분이 생기니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생기니 사랑하게 된다. 사랑의 과정은 항상 똑같나 보다.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드립, 에스프레소 음료뿐 아니라 캔커피로도 이 사랑은 번져갔다. 캔커피도 나의 취향이 생겼는데 여러 커피를 마셔봤지만 제일 맛있는 캔커피는 동서에서 나온 스타벅스 더블샷 에스프레소 엔 크림. 좀 달기는 하지만 이만한 커피는 에스프레소로 만든 바닐라 라테도 이기기 힘들다. 그다음은 조지아 오리지널. 커피지만 숭늉처럼 구수한 느낌이 좋다. 조지아 에메랄드 마운틴도 맛있었는데 요즘 단종되었는지 잘 안 보인다. 아쉽다.


  암튼, 이렇게 커피를 열렬히 사랑했었다. 하지만 점점 그 사랑은 여타 다른 사랑들처럼 익숙해지고, 옅어지고, 또 관대해지고 있다. 허니 프로세스를 거친 커피가 있다면 좋지만 아니어도 좋다. 베트남 로부스타 원두도 좋다. 에스프레소라 부르기엔 민망하지만 간편하니까 모카포트도 좋다. 에스프레소 커피가 아니어도 레쓰비여도 동서 모카골드도 베트남 g7 커피도 다 좋다. 커피면 아무렴 좋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산 중턱에 살던 커피가 바다 건너 남미, 동남아시아까지 번성을 해 준 덕분에, 커피 하나 안 자라는 한국에서 편하게 마시니 이번 인생은 얼마나 감사한가! 오늘 밤은 에티오피아 방향으로 3번 절하고 잠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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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헛소리 주의! 유사 전문가 주의!) 여기서 커피 잘 모르는 사람도 잘 아는 것처럼 허세 부리는 팁. 먼저, 커피를 마실 때, 맛 표현은 무조건 ‘바디감’이나 ‘밸런스’ 같은 모호한 표현을 쓰면 된다. 그냥 맛있으면 ‘바디감 있고, 밸런스가 잡힌 커피’네. 맛없으면 그 반대로 말하면 된다. 그 외에 특정 맛을 말할 때는 커피 쟁이들의 용어, 커핑 노트의 표현을 써야 허세를 부릴 수 있다. 다들 알 듯이, 신맛 대신 시트러스 향, 산미가 있는 커피, 쓴맛 대신은 쓴 다크 초콜릿 같은 맛, 고소함 대신 너티함이라고 하면 된다.


  또 커피 아는 척에는 원두가 빠질 수 없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남들이 다 알법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나 콜롬비아 수프리모 이런 건 무시당하기 좋다. 약간 희귀하면서도 들어봄직한 나라로 말하는 게 좋은데, 비싼 거 좋아하는 하이엔드 커피 마니아로 보이고 싶다면 파나마 게이샤. (꼭 파나마를 앞에 붙여야 하고, 파나마가 게이샤지 다른 게이샤는 흉내만 내는 짝퉁이라는 말을 꼭 붙여야 한다.)  무난한 것은 과테말라 안티구아나 인도네시아 만델링, 코스타리카나 르완다쯤 말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피는 아무리 에스프레소 머신이 좋다 해도 실력 있는 사람 손으로 직접 내린 드립으로 마시는 것만큼 맛있는 게 없다고 하면 끝이다. 이러면 커피의 커 자는 몰라도 허세만큼은 잔뜩 부릴 수 있다.


  여기서 실습해보자, ‘나는 쓴 커피로 주세요’라는 말을 허세 있게 하고 싶다면. “저는 풀 시티로 로스팅한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좋아합니다. 그 특유의 다크 초콜릿 같은 맛에 깊은 바디감과 너티함이 좋거든요. 물론 따뜻한 드립으로 부탁합니다.”라고 하면 된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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