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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Aug 28. 2022

출장이라는 이름의 한달 살기

220828

정읍에서 벌써 32일째.


출장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저번 달, 이렇게 길어질지 모르고 가벼운 마음과 짐으로 출장을 떠났었다. 그리고 그 뒤 집은커녕, 경상도 근처도 못 가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얼마나 길었는지 그 한 달간 정읍에서 평이 좋다는 음식점이란 음식점은 다 가보았다. 그중, 갈비 매운탕, 비빔 짬뽕과 같이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기 위해 탄생한 혹독한 음식들을 맛보았고, 그중 맛있는 가게들을 엄선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단언컨대, 난 정읍 시민보다 정읍에서 맛있는 식당을 더 잘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긴 출장은 처음이었지만 본래 내가 다니는 회사는 출장이 잦다. 왜냐하면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가 식물공장을 설계하고, 그 설계를 바탕으로 설치해주는 것. 그래서 입사한 뒤 겨우 1년 남짓 지났지만, 벌써 서울하고 경기도 몇 번, 충청도도 몇 번 다녀왔다. 경상남도는 헤아릴 수 없도록 자주 갔다. 이번에 처음 전라도를 갔으니, 제주도랑 강원도만 가면 ‘출장으로 전 지역 다니기’라는 이름만 들어도 딱한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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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출장이 잦다고 하면, 다들 걱정한다. “출장 다니는 거 괜찮아?”라고. 하지만 난 출장이 좋으면서도 싫다. 나에게 출장은 참 애매하다. 설명하자면 극명하게 좋고 싫음이 나뉘는, 예컨대 한입 한입이 두려운 찐득한 초코퍼지 케이크나 8월 땡볕에서 즐기는 일본 교토 여행과 같은 거다. 그렇기에 출장은 두려우면서도 좋다. 그러면서 내심 언제 가나 또 기대한다.


출장의 효능에는 여러 가지 있지만. 먼저, 첫 번째는 출장 중에는 내 돈 쓸 일이 없다는 것이다. 회사마다 출장의 규율이 다르다. 어떤 회사는 출장 시 지원이 하나도 없는 반면, 어떤 회사는 월급에 출장비를 더 얹어서 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우리 회사는 출장 시에 법카를 지원해 준다. 그래서 출장 가면 앵간한 건 다 법카 사용이 가능하다.


법카를 쓸 수 있는 곳은 출장지로 가는 이동비에서 아침, 점심, 저녁, 식후 커피와 간식거리. 그리고 숙박비까지. 나 같은 사람은 누구나 이런 불순한 상상을 하겠지만, 당연하게도 법카로는 신라호텔에서 파는 짬뽕이나 망고빙수, 한우 투플 갈빗살과 먹는 후식냉면, 갓 잡은 싱싱한 랍스터 갈릭 버터 구이 등을 먹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출장비 사용 규정이 빡빡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덕분에 출장만 가면 그 지역 맛집 투어는 확실히 한다. 그래서 우리는 출장을 와서는, 관광객들이나 먹을 갈비 매운탕 같은 것을 먹고, 낚여버린 자신을 자책하며, 살이 오른다. 하지만 그 외 세탁비나 주말에 놀러 다니는 비용, 모바일 게임 가챠나, 모 회사의 임직원들처럼 비트코인, 골드바, NC 소프트의 주식 정도도 법카로 살 수 있으면 출장 온 우리들의 사기 짐작에 큰 도움은 되겠지만, 아쉽게도 숙박비 식비 외에는 회사 내규에 의해 막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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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출장은 확실히 기분전환된다. 나는 한 곳에 오래 붙어 있지를 못한다. 흔히 말하는 역마살이 단단히 끼여있는 인생이다. 그렇기에 매년 새로운 곳에서 새해를 맞이해왔다. 최근 5년만 생각해 보아도, 부산과 수원, 남미 콜롬비아와 서울 은평구를 지나와 지금은 안동까지 매년 다른 곳으로 이사해왔다.


이렇게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삶을 살다 보니, 이제는 조금만 머물러 있어도 좀이 쑤신다. 그렇기에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이 비즈니스 ‘트립’이 내게 안성맞춤이다. 한번 가면, 적어도 1주 길게는 이렇게 1달을 있으니, 사실상 한국 한 달 살기 중이다. 게다가 언제는 서울 인근, 언제는 완전 시골, 이번에는 정읍까지. 매번 색다른 곳으로 출장을 간다. 이게 꿈의 한 달 살기가 아닐까? 월급이 보장되는 한 달 살기! 회사 돈으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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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기에 출장을 안 가면 손해처럼 보이지만, 사실문제도 제법 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출장이라는 거다. ‘비즈니스’ 트립. 회사로 출근하면 사실 근무시간의 절반은 몰래몰래 딴짓한다. 아이디어 회의라는 이름으로 헛소리를 늘어놓거나, 화장실에서 숨어서 쉬고, 휴대폰으로 몰래몰래 주식도 해야 한다. 하지만 출장을 좀 다르다. 다 같이 모여 한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서로 하는 일이 다 보인다. 좀 농땡이 부리면 말 안 해도 모두가 안다. 게다가 공사하는 시간도 그에 따라 늘어날 테니 눈치가 더 보인다.


게다가 개인적인 공간도 없다는 점도 크다. 방은 보통은 2인 1실. 밥도 영수증 처리가 귀찮아질 테니 최대한 같이 먹는다. 저녁 먹고 운동하는 시간 빼고는 사실상 붙어 있다. 물론 같이 있는 동료들이 불편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개인 공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함께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조용히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어디선가 주사기로 스트레스를 천천히 주입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이건 아주 사소한, 나의 옹졸한 마음에 기인하는 거지만. 내가 쓰지도 않는 비용을 내는 게 아까워 죽겠다. 예컨대, 관리비라던가 인터넷비, 유튜브를 큰 화면으로 보려고 거금 주고 산 티비 같은 것들. 두고 온 것들이 너무 아깝다. 내가 왜 이렇게 돈 벌어서 우리은행과 대성청정에너지의 잔고를 불려주는지 모르겠다. 택배도 애매해다. 택배사의 실수로 일주일이나 늦게 온 펩시 제로는 현관문에서 출장 간 나를 한 달 넘게 기다렸었다. 안동의 무시무시한 괴한들이 탐스러운 나의 펩시 제로를 탐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살아남았었다. 역시 한국에서 현관문 밖 택배는 늘 안전하다. 단 하나 자전거를 제외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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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여하튼. 남미든 세계여행이든 한시도 가만히 한 곳에 못 머무르던 내가 드디어 나랑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덕분에 일 년 12개월 중 절반을 출장지 모텔에서 내 돈 하나 안 들이고 진귀한 음식으로 살 찌우기를 하고 있다. 이게 내가 꿈꾸던 그 한 달 살기인가 싶긴 하지만, 빨리 우리 회사가 더 잘 되어서 강원도와 제주도, 그리고 동해바다를 넘어 미주나 몽골, 싱가포르 같은 외국에도 이 돈 찍어내는 기계, 스마트팜을 설치하는 날이 오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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