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정겹고,
알면 알수록, 불편해진다.

19년 05월 12일

by Sankim




나른한 오후.

교장과 교감과 함께 불편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면 퇴근이다. 빛에도 무게가 있다고 느껴질 만한 무겁고 뜨거운 햇볕이 내려 쬐는 1시. 집에서 기관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이지만 출근길과 퇴근길은 완전히 다르다. 출근길은 선선해서 가벼운 산책 같은 느낌으로 간다면 퇴근길은 불지옥을 걷는 느낌이다. 다들 헬조선 헬조선 하지만 이 햇볕이야 말로 정말 물리적 지옥이다.


불지옥을 뚫고 집에 들어오면 침대에 드러누워 별 시답지 않은 유튜브를 본다. 지금은 쉬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로 충분한 상태로. 그러다 3시쯤 지나면 오늘도 이러다 어영부영 하루가 다 가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신경을 긁는다. 그래서 휴대폰 충전기만 하나 챙겨 근처 카페로 온다. 와서도 특별히 하는 건 없지만 돈을 쓰고 앉아있는 거 만으로도 조금 위안이 된다. 몹쓸 소비습관이다.


KakaoTalk_20190831_180546939.jpg 에티오피아 산골에 있던 빨간 열매 씨앗을 말려다 볶아서 차를 만들 생각을 해준 그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모든 창작활동에는 작가의 마음이 물들게 되어있다. 그래서 나의 글에는 "나의 정신없음"들이 물들어 있다. 그리고 틈만 보이면 개그 치려는 욕심들도 잔뜩 물들어있다.


특히나 재밌는 건, 글을 쓸 때의 감정이 글에 물든다는 것이다. 즐겁고 재밌는 시간을 보낼 때의 글은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드는 즐거움이 물들어 있다. 하지만 글쓰기 싫거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긴 날이면 어김없이 "겉은 밝은 척하나 뒤는 기분 나쁜 꿍꿍이가 있는 글"이 되곤 한다. 글 하나 잘 쓸려면 삶의 태도마저 달라야 한다는 거다. 거참 피곤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학교를 이제 2주째 다녔다. 특별히 학교에서 하는 것은 아직은 없다. 교장도 그런다 지금은 conocer 하는 시간이라고. conocer는 사전상으로는 "알다"라는 뜻이다. 근데 "안다"는 뜻의 단어가 스페인에서는 두 개다. saber와 conocer. 한국에서는 같은 개념이지만 스페인어에서는 '해봐서 아는 것들' 혹은 '경험해보는 것'을 여기서는 conocer라고 한다. 반면, saber는 지식이나 기술을 아는 걸 말한다.


스페인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수십 가지나 되는 동사 변환과 불규칙들만으로도 사람들을 충분히 괴롭혔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이런 생소한 개념들 덕분에 스페인어가 더 어렵다. 한국어도 배우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더 많은 예외와 동사변화들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 와서 억울해 죽겠다. 이 싸람들! 혼쭐이 나야 한다.


여하튼 conocer 말 뜻대로 학교를 경험해보고 있다. 학생들과 이야기해보고 선생님들과 친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길가다가 갑자기 멀리서 "Santiago산티아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럴 때면 나도 "Hola올라!" 하면서 큰소리로 인사해준다.




이제 학교에서 제법 친한 친구도 생겼다.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기계과 선생님인데 그전에 말했던 이마에 "착함"이라고 쓰여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스마엘 씨 이름을 들었을 때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인가 했다. (미안하지만 생긴 것도 엄밀히 말해서 중동 사람처럼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매주 성당에 다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착한 이스마엘 씨는 내게 여러 번 식사 초대를 해주셨다. 처음에 식사를 초대해 주셨을 때, 어디를 갈지 물어봐 주셨다. 두 가지 선택지를 말했지만 둘 다 들어 본 적도 없는 곳이었고 어딜 가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그냥 느낌이 좋은 첫 선택지를 골랐다. 좋은 선택을 했다는 듯한 이스마엘 씨의 묘한 웃음과 그 부인의 좋아하는 모습에 나 또한 괜히 좋아졌다. 집 근처 가까운 곳에서 먹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차는 시작부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산 구석으로 향했다.


부까라망가가 안데스 산막에 끝자락에 있지만 그래도 나름 안데스 산맥이라서 4000미터는 그냥 넘는 산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래서 길은 강원도 산길처럼 꼬불꼬불했다.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자고 한 걸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두 번째 선택지는 집 앞 5분 거리 햄버거집이었다.)


KakaoTalk_20190831_180615096.jpg 저어기 우리 집도 보이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부까라망가는 북쪽으로 갈수록 위험하고 산 쪽으로 갈수록 위험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험하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산다'는 의미이다.


콜롬비아에는 에스트라토Estrato라고 불리는 지역의 레벨을 나누는 시스템이 있다. (에스트라토는 사전으로는 지층, 계층이라는 의미이다.) 에스트라토는 1부터 7까지 있다. 숫자가 낮을수록 더 수준이 낮은 동네를 뜻하고, 기초적인 공공요금들의 가격도 더 낮다고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코이카 사람들은 에스트라토 3 이상인 곳에서만 살 수 있도록 허락이 난다고 한다.


내가 올라가던 꼬불꼬불한 도로 옆에는 굳이 말하자면 집이라고 불러야 할 것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차조차 올라가기 버거워하는 경사였는데 그 옆에 있는 집들이다 보니 계단이 천국까지도 이어져 있을 법한 높이로 있었다. (확실한 건 여기서 넘어진다면 천국행이다.)


물어보니 여기는 에스트라 토로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동네라고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불법으로 만들어진 판자촌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는 1보다도 더 낮은 에스트라토 0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공공 버스가 다니지 않고 아침저녁에만 통근 버스, 통학 버스가 조금 다닌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여기서 많이 산다고 이스마엘 선생님이 알려 준다. 창 너머로 집안 살림 가지들이 보인다. 쭈굴쭈굴해 보이는 원색 계열 옷들이 방안 천장에 널려있고 낡고 뚱뚱한 브라운관 티브이가 켜져 있다. 그 앞에는 마약을 한 건지 졸린 건지 풀린 눈으로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고속도로를 지나 흙바닥 길을 지나갈 때, 비로소 지금 내가 팔려가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팔려가더라도 커피농장에 팔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때쯤 큰 주차장과 함께 La Niebla라고 하는 식당이 나타났다.


부까라망가보다 대충 7~800미터는 더 높은 것 같은 산 중턱에 있는 이 식당은 실은 내가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나서 천국에 도착한 게 아닐까란 의심이 들게 하도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쁜 집과 산과 내려다보이는 부까라망가. 집 근처나 가는 줄 알고 대충 입고 온 부랑자 같은 나와는 대비적으로 우아하게 꾸미고 온 사람들이 오는 고오급 식당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무슨 사람이길래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즐거운 한때를 보냈지만 그 의문과 찜찜함은 마음 한구석에 계속 무겁게 남아있었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그 날 저녁 늦게 근처 쇼핑몰에 살게 있어서 나왔다. 우기라서 별 하나 달하나 떠있지 않은 컴컴한 밤하늘에 저 멀리서 붉은 불빛들이 떠있다. 에스트라토 0 동네에서 켜진 가로등 불빛들이었다.


아마 저기 사는 사람들은 내일 저 불빛들 사이로 어둡고 컴컴한 새벽을 뚫고 우리 학교로 등교하거나 길거리에서 200원짜리 커피를 팔러 나오거나 누군가의 집을 청소해주러 나올 거다. 그런 생각까지 이어지니 저 붉은 불빛이 꼭 핏빛으로도 보였다.


KakaoTalk_20190831_181641791.jpg 하늘은 푸르고 집은 그림 같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 혼자 츄리닝 입고 있는 아시안의 기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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