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를 게 없는 크레페도
쌓이면 맛있는 케이크가 된다.

19년 05월 06일

by Sankim




사람이 가장 독창적인 시간은 잠들기 직전이라고 한다.

피곤해서 몸은 뻗어버렸고 침대에 누워서 머릿속으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필름처럼 돌아볼 때. 눈은 감았지만 그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또 물고 이어져갈 때. 오늘을 돌아보면서, 하루가 정리되면서, 고민들의 그럴듯한 답을 얻거나,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하거나, 내일 뭐 먹을지와 같은 중대사항을 정하기도 할 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중요한 선택들은 이렇게 자기 전에 누워있다가 선택했다. 코이카에 오게 된 것도 이렇게 궁리하는 새벽 밤이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얼굴이 있어서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던 두근거리던 밤도 있었다. 물론 내일 먹을 것을 궁리하다 잠든 밤도 수두룩하다. 이렇게 글 뭐 쓰지 하면서 궁리하는 이 밤도 그렇다. 유튜브 채널 미러볼 뮤직에서 그럴듯한 노래 하나 켜다가 마음 가는 대로 써볼까 한다. 오늘은 부디 읽을만한 게 나오면 좋겠다.




출근은 6시 반. 5시 40분이면 최후의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쭉 못 듣다가 마지막 알람에서야 잠에 깨는 것이 매일 아침 관례가 되었다. 아침으로 먹으려고 사온 토마토는 아직 먹어본 날이 없다. 눈 주변에 겨우 물 묻히고 정신없이 서둘러 학교를 도착하면 6시 35분 정도 된다. 매일 지각한다는 사실은 한국말을 모르는 교장한테는 비밀이다.(쉿)


일과 대부분의 시간은 기계과 건물에서 보낸다. 기계과 건물은 미스터리한 곳이다. 왜냐하면 부카라망가 그 어디보다도 유독 모기가 많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기 빼고는 모기에 물린 적이 없다!) 유일하게 살갗이 드러난 부분이 발목이라서 발목을 멀리서 보면 얼핏 발찌를 한 거처럼 붉은색 모기 물린 자국이 발목을 둘러 감싸고 있다.(지금 세어보니 발목에만 17군데 물렸다. 단 일주일 출근만에 이룬 기념비적인 쾌거이다.) 부까라망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아시안 피를 취급하는 맛집으로 소문나서 이 건물에 이렇게 모기가 많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기계과 건물에는 언제나 사람이 붐빈다. 그래서 내내 학생들 떠드는 소리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 선생님들의 저질 19금 유머, 껄껄 웃는 소리가 천장이 높은 이 건물 안으로 울린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학생이 다 빠져나간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서 숨어있던 학교 길고양이들이 돌아온다. 우린 길고양이들의 집을 잠시 오전에 빌려 쓰는 거다.




동료 기계 선생님은 총 5명. 2분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선생님들이고 3명은 내 또래의 젊은 선생님이다. 겉으로 봤을 때는 모두들 "착함"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있는 사람처럼 생겼는데 또 실제로도 정말 착하다. 하루 종일 몰래 나만 관찰하시는지 내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도와주고는 Gracias(감사합니다)란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올연히 갈길 가신다.


그리고 또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도 커피를 권하신다. 첫날은 예의상 물어봐 주시는 거 다 받아먹었더니 하루 종일 손에 진동 기능이 생겨버렸다. 마신 커피의 개수와 모기한테 물린 개수가 늘어나는 만큼 기계과 선생님들과 점점 친해지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학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수업을 정착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랑 더 친해져야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커피는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사무실에서 잠깐 나와 바람 쐬고 있으면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둘러싼다. 내가 학생인지 선생님인지 물어보고, 나이, 콜롬비아 온 지 얼마나 됐는지, 무슨 콜롬비아 음식 좋아하는지 등등 여기 와서 수백 번은 들은 똑같은 질문 레퍼토리로 물어본다. (아마 외국인을 만나면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지를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꺄아 소리 지르는 것도 그 레퍼토리에 있는 것 같다. 이게 다 BTS 인기 덕분이다. 내가 어렸을 적 문방구를 가면 팔던 딱지, 연예인 사진 같은 것들이 여기도 똑같이 있다. 남자애들은 포트 나이트라는 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딱지를 사고, 여자애들은 BTS나 블랙핑크가 그려진 딱지를 산다.


으레 그렇듯 아이들에게 꽤나 소중한 물건이라서 내가 구경해도 되냐고 가져가서 보면, 그 여자애의 눈빛이 나의 얼굴을 뚫을 듯 뜨겁다. 하나라도 슬쩍하는 순간에는 총기 소지가 공공연한 콜롬비아에서 큰 원수가 하나가 생길 판이다. 여기서의 BTS는 내가 학창 시절에 보던 동방신기 같은 느낌이다. (둘 다 이름이 난해한 것도 똑같다.)


나는 기계 단원으로 왔지만 코이카에 K-pop 단원이 있다면 딴 건 몰라도 현지 반응은 폭발할 거다. 물론 그것이 국제개발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 K-pop단원이 있다면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 하나만큼 어린 학생들 마음에 박아놓고 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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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대회가 매년 개최된다. 작년 우승한 식당에서 한입 했다. 쉑쉑버거정도는 튀긴 바나나선에서 정리된다.


요즘 나의 업무는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기다. 주로, 수업에 대한 이야기 수십 초, 그리고 누가 술을 잘 마시는지 서로 경쟁하는 이야기 1시간, 요즘 콜롬비아 산업에 대한 이야기 2~3분, 그리고 부까라망가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 집이 어디인지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열띤 토론 1시간, 이런 식이다.


그리고 내가 알아듣는 말이 얼마 없으니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상한 소리들을 주로 하시는데. 주로 쟤는 바보니까 어울리지 말라던가 쟤는 나보다 축구 못한다 같은 말이다. (이거도 못 알아들으니 정말 정성스럽게 설명해준다. 발을 가리키며 쟤는 다리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해 준다.) 이런 고등학교 사춘기 학생들 같은 철없는 쾌활한 이 느낌이 좋다. 나는 몇 마디 말할 수 없으니 그냥 분위기상 무조건 맞다고 해준다. 그래서 벌써 바보 몇 명과 술 챔피언 하나와 발 없이 축구하는 사람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업무 이야기는 양심상 틈틈이 한다. 그중 하나의 쾌거는 기계과에 컴퓨터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고 구석에서 골판지 상자 속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어떤 기업에서 조세회피용으로 후원해준 거라고 하는데 컴퓨터를 둘 교실이 없어서 창고에 넣어뒀다더라. 꺼내서 먼지를 후후 불어 털어내고 사용해보니 아직까지는 그래도 쓸만해는 보인다. 역시 조사하니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첫 수업은 이 오래된 노트북 수십 대와 함께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점심시간마다 나는 교장실에 불려 간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국에서 교장실을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릇 교장실이란 곳은 엄청 똑똑한 아이들이나 말썽 부리는 아이들이 찾게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애가 있었어?"라고 친구들이 이야기할 정도로 튀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었다.


이제 코이카로 오면서 좀 튀어보게 살게 되니 바로 교장실로 매일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근데 오해하지 말기를. 나는 매 점심마다 교장실을 가는 건 혼나러 가는 건 아니다. (칭찬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과 점심을 매일 같이 먹기 때문이다. 사실 불편해 죽을 것 같아서 결론적으로는 혼나는 듯 불편한 마음으로 먹는 둥 마는 둥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교장과 교감과 점심을 먹고, Buenas Tardes부에나스 따르데s 하면서 교장과 교감과 악수로 나의 마지막 업무가 끝난다.


교장이 밥 먹으면서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Tranquilo뜨랑낄로"라는 말이다. 트랑낄로는 사전에 의하면 "조용한, 조용히, 침착한, 걱정 없는"이란 뜻이다. 이 뜻의 의미는 참 광범위하다. 걱정을 할 때도 걱정마라는 의미로 뜨랑낄로. 쉴 때도 푹 쉬라는 의미로 뜨랑낄로. Gracias그라시아스라고 하면 그 대답으로 별거 아니라는 의미인 뜨랑낄로. 시끄러울 때도 뜨랑낄로. 내가 밥을 사겠다고 하면 '내가 낼 테니 넌 조용히 입 닫고 먹기나 해라'는 의미로 위협적으로 하는 뜨랑낄로까지. 영어로는 Relax랑 느낌이 비슷하다.


여기서의 하루하루가 이 뜨랑낄로랑 가장 비슷하지 않나 싶다. 매일매일 일상이 한 겹 한 겹 쌓여가면서 서서히 적응되어가는 이 삶이 참 뜨랑낄로하다. 다사다난하기 쉬운데 이렇게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는 건 이곳에서 함께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참 감사하다. 뜨랑낄로. 모두들 뜨랑낄로한 삶 살기를. A dios.


KakaoTalk_20190823_230919335.jpg 우리 집 창밖 이쁜걸 세상 사람 전부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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