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06월 13일
또 인터넷이 말썽이다. 어제부터 인터넷이 계속 시름시름 앓고 있다. 처음에는 이 집에 와서 아직 인터넷 요금을 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요금을 안내서 회사에서 자른 줄 알았다. 그래서 관리실에 내려가서 인터넷이 안된다, 혹시 내가 돈을 연체했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참 콜롬비아스러웠다. 도둑이 들어서 인터넷 장비를 털어 갔단다. 하하. 어이가 없었다. 역시 여기 도둑질은 마법 그 자체다. 아무튼 인터넷이 이틀 사흘 안되니 답답하다. 여기서 한국을 기대하면 당연히 안 되는 거지만 이럴 때마다 한국이 간절히 생각난다. 어떻게 인터넷이 안되는데 이 사람들은 천하태평할 수 있지? No Pain No Gain, 그리고 No internet No life 아니던가? 절레절레. 오늘도 갑자기 끊어져버린 인터넷 때문에 화가 나지만, 그래도 난 봉사 온 거니까 참는다.
봉사를 왔지만 사실 봉사하러 온 게 맞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계속 든다. 내가 여태껏 해온 봉사와는 사뭇 다른 환경에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시간 채우려 의무적으로 했던 봉사를 빼고 자발적으로 한 첫 봉사는 필리핀 해외봉사였다. 교회 목사님이지만 지역사회공헌에 더 힘을 쓰시는 우리 목사님은 수원 지역 공헌을 넘어서 다른 제3세계를 돕기 위해 봉사단을 꾸리셨다. 봉사단에 청년이 필요하다며 목사님은 반 강제로 그냥 일개 교회 청년이던 나를 봉사단에 집어넣으셨다.(생각해보니 자발적이 아니었네.) 이러타할 반항을 못한 채 필리핀 행 비행기에 내 생에 가장 말을 안 들었던 초중고등학생들과 함께 몸을 욱여넣었다. 우리가 간 곳은 마닐라 근처에 있는 쓰레기 마을. 이 마을은 부자동네 마닐라에서 온 쓰레기를 매립하는 곳 옆에 있었다. 이 마을은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거나 재활용품을 분리수거해서 돈을 벌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는 오늘 생존하기 위해서 내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분리수거를 하는 데는 아이나 어른이나 같은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 건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우리가 가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책 연필 나누어주고 놀아주고 그리고 슬퍼할 뿐이었다.
다음에 했던 봉사활동은 말레이시아에서 했었다. 1년간 말레이시아에 있는 교회에서 선교라는 이름하에 먹고 노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얼마나 심심해 보였는지 목사님께서 근처 난민학교에서 봉사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전철역 근처 을씨년스러운 상가건물. 눈이 풀린 채로 물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지나 3층에 올라가니 콤콤한 냄새가 나는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다양한 이유로 난민을 신청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다. 사회 정치적인 문제들은 아이들에게 이해하긴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저 아이들은 말레이시아에 놀러 온 듯이 해맑았다. 나는 그중 열 살쯤 되는 아이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리켰다. 난민 학교에 있다는 것 빼고는 그 나이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집중 못하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시간만 나면 문제를 풀어라고 나누어 준 인쇄지로 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가면 갈수록 수업이 아니라 비행기 접어 날리는 놈을 잡으러 다니는 게임이 되어갔다. 이 곳 아이들은 다들 왜소해서 나이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점심을 300원도 채 하지 않는 주먹보다 작은 빵으로 끼리를 때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이면 갑자기 한 학생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학생들이 채웠다. 이야기 듣기로는 누구는 난민 인정을 받아서 말레이시아 국적을 받아서 다른 학교를 다닌다고 하고 누구는 인정받지 못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오늘내일하는 끔찍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런 운명에 있는걸 꿈에도 모르고 해맑게 몰래 비행기 접어 날리는데 열중했다. 인도네시아 롬복에서도 봉사활동을 했었다. 발리 옆에 있는 롬복은 윤식당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여행자들의 천국, 비싼 쇼핑몰들과 근사한 리조트들이 펼쳐진 해안. 하지만 맥도널드를 간 것이 자기 평생 최고의 자랑인 듯 울먹이며 봉사단원들에게 고마워하는 아이들도 많이 살았다. 롬복의 하늘은 별이 가득했고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일렁였지만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현실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근본적인 질문이 내 속에서 일렁였다. 만인은 평등하다던 누구의 말은 반쪽짜리였다. 많은 책들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누리는 많은 혜택들은 누군가의 불공정한 착취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가난해야 누군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나의 편함이 불편했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이전에 있던 곳들에 비해서 너무 좋은 환경이다. OECD에도 곧 가입한다는 뉴스도 접했다. 흔히 OECD는 선진국들끼리 편먹은 게 아닌가. OECD 다른 회원국들에 비해서 콜롬비아가 여러 경제 지표에서는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확실히 중진국이다. 남미 내에서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다음가는 페루랑 비슷한 규모의 나라니 말이다. 봉사하면 떠올리는 모습들, 예를 들어 유리창에 유리도 끼워지지 않은 흙집에서 손 씻는 법을 가르쳐준다던가 소똥을 빚어 집을 짓는다던가 우물을 파준던가 하는 건 여기 없다. 대신 정규 고등학교 수업에 포토샵이 있다. AutoCAD수업도 있다. 게다가 내가 와서 더 지원이 많아지고 있다. 갑자기 수업용 태블릿이 40개 생겼다. 선생님 교무실에 인터넷이 들어왔고 선풍기도 하나 생겼다. 그제는 기계과 선생님이 학생들을 불러 창고를 청소하고 있다. 이야기 들어보니 여기에 컴퓨터실을 만들기 위해서 청소한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이것을 싼티아고 효과라고 부르고 있다.
콜롬비아는 확실히 잘 산다. 그래서 간혹 누군가가 여기 왜 왔어? 물어보면 봉사가 아니라 협력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르게 말하면 또 은혜를 갚는다고도 말한다. 남미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에서 우리 손을 잡아준 나라기 때문이다. 기계과에 콧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한 선생님은 나만 보면 자기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다녀오셨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자기가 다녀온 것도 아니면서 한국의 겨울은 춥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총만 겨우 빼꼼히 빼내 총을 쐈다는 등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참 고맙다.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가 경제성장을 해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된 첫 국가이다. 이런 도리를 갚는 건 당연한 거다. 염치가 있다면 말이다.
요즘 수업 준비를 하느라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쳐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는 수업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지식을 현지 선생님께 알려줄까. 이런 고민들이 기꺼이 감사한 건 고마운 환경과 인간으로서의 도리, 그리고 매번 교장선생님께 점심을 얻어먹어서 생긴 눈치 때문이리라. 한 달 있으면 첫 수업이 시작된다. 부디 내가 쓸만한 인간이길. 그리고 끝날 때까지 이런 마음이길. 좋은 협력이 되기를. 그리고 인터넷이 이젠 좀 잘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