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10월 18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꽤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어처구니없는 고민이었다. 절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죽음이라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이것을 꽤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어쩌면 죽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기왕 죽는다면 내 편의에 맞춰서 죽고 싶었다. 예를 들어 죽을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만 단채 매일매일 눈만 깜빡이다 천문학적인 빚만 남기는 죽음은 최악으로 싫다. 그렇다고 해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단번에 아프게 죽고 싶지도 않다. 한국 대표 겁쟁이로서 손색이 없는 내가 그런 용감한 선택을 할리가 만무하다. 물에 익사해서 죽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가장 보기 끔찍한 시체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라고 하지 않는가. 내 몸이 물에 퉁퉁 불은 채로 죽는다면 안 그래도 살쪄서 통통한데 더 뚱뚱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죽고 싶은 방법을 두 가지를 고안했다. 첫 번째는 블랙홀에 빠져서 죽는 것이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시공간이 뒤틀리고 중력이 너무 높기 때문에 나는 무한한 시간에 갇혀버리겠지. 대신 우주선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고니가 밑장 빼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져 없어져버릴 거다.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과학적 호기심이 솟구친다. 아마 이렇게 죽는다면 다윈상 역대 수상자 리스트에 오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다윈상은 이름만 들으면 과학적 대발견을 한 사람이 받을 것 같은 상이지만 실제로는 멍청하고 한심한 방법으로 죽거나 생식기능을 잃은 사람이 받는 상이다. (다윈상은 이들의 멍청한 유전자를 인류의 유전자에서 자발적으로 지워서 인류 진화에 큰 공로를 인정했기에 주는 상이다.) 대신 죽기 위해서 너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좀 걸린다.
그래서 블랙홀에 도달할 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면 다음으로는 청산가리를 먹고 죽는 것을 두 번째 방법으로 생각해두었다. "청산가리 맛은 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도시 전설로 유명한 이야기로 어느 한 일본인 화학자는 연구의 일환으로 화학물들의 맛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 화학자가 마지막으로 먹은 화학물이 안타깝게도 청산가리였고 그 화학자는 죽어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달다"라고 적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청산가리가 단지 안 단 지 너무 궁금했다. 허락된다면 나의 과학적 그리고 미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죽기 직전에 한번 먹어보고 싶다.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꼴좋게 목사님 앞에서 자랑처럼 떠들었다. 목사님은 나에게 별 시답지 않은 고민을 한다며 크게 혼내셨고 그 시답지 않은 고민에 동참해 주셨다. 그래서 청산가리 먹는 것은 자살이므로 기독교적으로 죄가 되지만 블랙홀은 자살로 보기 힘들어 죄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역시 그 신도에 그 목사님이셨다.
이렇게 죽고 싶은 방법을 구상해 뒀건만 다 의미 없었다. 4일간의 휴가, 보쟈카주Boyaca로 향하는 버스는 나의 이러한 특별한 죽음에 대한 의지를 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길었고 지루했고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죽더라도 그냥 이 영원해 보이는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했다. 약 300km 정도밖에 안 떨어진 보쟈카주이지만 버스로는 10시간이나 걸리는 영겁의 길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갈만한 버스여행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너무 좋았다. 들판에 피어난 노란색 들꽃들. 멀리 민둥산 군데군데 푸르게 모여있는 초록 숲들. 손 인사해주는 선인장들. 길가에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벽돌집들이 가끔 있었고 들판에는 자유로이 풀 뜯어먹는 양, 소,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버스 길 내내 이어졌다. 지루해 죽겠다. 엉덩이와 허리는 아파왔다. 처음 불평은 "내가 왜 이 버스를 탔을까? 도착하기는 할까?"로 시작했다. 그리고 "난 왜 이런 영겁의 고통을 받기 위해 태어난 걸까?"라는 근본, 본질의 질문까지 이어졌다. 아무리 가도 가도 도착하지 않고 아무리 가도 가도 달라지지 않는 풍경이 이어졌다. 대신 달라지는 건 심해지는 허리 통증과 엉덩이가 편육이 되어 가는듯한 고통이 매초 배가되어간다는 점뿐이었다.
지루함, 슬픔을 넘어 나의 존재론적인 분노와 광기까지 이어져 갈 때쯤 바깥공기는 서서히 차가워졌다. 반가운 신호였다. 1년 365일 초여름 같은 부까라망가에서 벗어나 매일 가을 날씨인 보쟈카주에 도착했다는 신호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버스는 부지런히 달려 도착했다. 굶주리고 힘들고 아프고 분노하고 짜증 난 나는 버스라는 셀프 감옥에서 벗어나서 절규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돌아가는 버스도 이 버스였다. 그렇게 잡쳐진 기분으로 보쟈카주 여행이 시작되었다.
보쟈카주와 부까라망가는 같은 나라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다른 곳이었다. 부까라망가는 정말 인디언부터 백인, 흑인, 그 사이 혼혈들까지 다양한 인종이 사는 도시인데 비해서 보쟈카주는 원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였다. 그리고 날씨는 꽤 추워서 여행 내내 경량 패딩을 가져올걸 후회할 정도였다. 내가 도착한 보쟈카주의 소가모소Sogamoso라는 동네는 다 나지막한 갈색 벽돌집들, 길거리는 깡패처럼 떼를 지어 다니는 개들과 빈 공터에서 여유롭게 풀 뜯어먹는 소와 말, 그리고 도로에는 자동차와 함께 쓰레기를 수거하는 수레를 끄는 마차가 다니는 동네였다. 내가 있던 부까라망가는 그래도 유럽향이 조금 첨가된 곳이었다면 여기야 말로 남미, 모험의 땅이었다. 고도는 또 어찌나 높은지 조금만 서두르면 숨이 찼다. 컥컥 거리며 마시는 공기에는 미세먼지가 많아서 꼭 한국 지방 소도시에 온 듯한 착각도 드는 곳이었다.
보쟈카에 도착하니 여기서 단원 생활을 하시는 선생님들의 환영이 거셌다. 씨름 선수 10명이 와도 다 못 먹을 음식들을 준비해 주셨다. 집에 초대받아서 소처럼 먹었지만 끝이 없었다. 먹는 속도보다 만드는 속도가 빠른 것 같았다. 어느 선생님은 "사육 시작"이라고도 하셨다. 그 이후 보쟈카에서는 배고프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배 부르다"와 "배불러 죽겠다"만 있었다.
나는 단원 선생님들과 보쟈카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처음으로 간 곳은 또따Tota 호수. 한국으로 치면 백두산 천지와 같은 이곳은 과거 화산활동으로 생긴 화산호였다. 호수는 어찌나 넓은지 파도가 쳤다. 그리고 호수의 고도는 또 어찌나 높은지 고도 3000m가 훌쩍 넘었다. 안 그래도 나약하기로는 코이카 단원들 중에서는 단연 첫째 하는 나. 역시나 고산증 증세로 죽을 둥 말똥 한 상태로 호수를 구경했다. 보쟈카 선생님들은 나보고 괜히 데려왔다 싶을 정도로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나는 정말 호수가 좋은데 몰라주셨다. 비록 고산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좋았던 날씨는 순간 폭우로 바뀌어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비에 젖은 생쥐꼴이 되었지만, 그리고 오는 길에 버스에서 멀미를 심하게 해서 오는 길 내내 역류하는 위산과 씨름했지만, 더구나 버스에서 아끼던 우산을 두고 나왔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따 호수가 마음에 무척 들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서도 너무 좋았다. 비 오는 송정해수욕장 같은 호수, 얼듯이 살 애리는 바람도 좋았다. 표정은 썩은 표정이었다곤 하지만 그것은 표정만 그랬다. 정말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아마 보쟈카를 갓 도착해서 간단히 요깃거리를 사러 마트를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을 거다. 큰 수레에 한국에는 잘 없는 유까Yuca 혹은 만디오까Mandioca라고 불리는 뿌리 식물을 잔뜩 싣고 가고 있는 한 모자를 봤다. 남자아이는 한 8살은 되었을까? 어머니는 낑낑거리며 수레를 끌고 있었고 아이는 크게 "유~카! 유~까!"라고 외치고 있었다. 꼬질꼬질해 보이는 모자의 모습과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휑하게 맴돌다 떠나는 "유~까!"라는 외마디 소리 때문에 그런가 안타까워 보였다. 같이 가던 단원 선생님께 이야기했다. "저렇게 한다고 해서 오늘 하루 얼마나 돈 벌 수 있을까요. 안타까운 거 같아요." 하지만 같이 가던 선생님은 저 삶도 나름대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아닐까요? 하며 반문하셨다. 그때 내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단순히 금전적 수익을 가지고 사람들의 행복을 재단했구나. 보이는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마음대로 불쌍히 여겨버렸고 힘들다고 결론지어버렸구나. 바로 반성했다. 그렇게 힘들었던 또따 호수에서 난 행복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국제 개발 협력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니까 그들의 생활환경을 뜯어고치려고 하고 그들의 전통, 가치, 생각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돈을 더 벌게 해 준다는 명분으로 기존의 삶을 해체시켜버리는걸 아주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터전을 무시하고 무너뜨린다. 근대화, 혹은 개발 협력이라는 이름하에서 말이다.
가난한 사람은 힘들 순 있지만 다 불행하지 않다. 행복을 어떻게 수치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행복한 사람들이 통계적으로 가장 많은 곳은 1인당 GDP 순위 123등에 불가한 부탄이라는 사실은 유명하지 않은가. 요즘은 GDP 순위와 행복도 사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는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도리어 과거 전통의 풍습대로 살던 마을이 자본주의의 바람을 맞아 비참하게 변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듯 말이다. 나의 삶이 좀 더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삶이 되기를. 길에서 유카 파는 모자 덕분에 보쟈카에 온 덕분에 나는 죽음을 논하기는커녕 다 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