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일 없이 산다

19년 3월 16일

by Sankim




¡Bueno부에노!, "Claro끌라로"(:당근빠따지)와 함께 요즘 내 입에 익어버린 말이다. "좋다"라고 번역하면 좋으려나? 아직 번역은커녕 제 앞가림도 못하는 스페인어 실력이기에 이게 맞을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뜻이 전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Bueno부에노"의 뜻은 "좋다. 아주 좋다."라는 뜻이다.


여기 함께 온 한 선생님은 그런 말을 하셨다.(코이카에서 서로의 호칭은 선생님이다.) 여기에 와서 삶의 질이 수직 상승했다고. 돈 많은 백수가 된 거 같다고. 봉사하러 온 거 맞나 싶을 정도 좋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도 딱 그 심정이다. 봉사 와서 다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왔었다.


하지만 웬걸 여기에 파라다이스, 엘도라도가 있었다.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딱 "Bueno".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중팔구 불쾌해질 이야기이지만 나는 별일 없이 잘 산다. 별다른 걱정 없다. 그래도 너무 노여워하지는 말기를.


KakaoTalk_20190530_103302415.jpg '난 별일 없이 산다.' 더 정확히는 '잘 먹고 산다.'


외국인이 된 지 이제 3주 차.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알게 되었는데 외국인은 휴학생보다도 더 관대한 직업(?)이다. (둘 다 직업이라 할 수 없다만 말이다.)


휴학생은 내가 여태껏 경험해 본 직업 중 최고의 직업이었다. 일을 하든 놀든 여행하든 뭐든 허락되는 직업이다. 특히나 놀수록 더욱이는 여행할수록 더 큰 격려를 받는다. 띵가띵가 놀면서 칭찬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니 완전 최고가 아닌가?


좀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을지 몰라도 "이때 아니면 언제 경험해 보겠어요? 이게 다 식견을 넓혀보는 거예요"라고 말하면 할 말 없게 할 수 있다. 다 그러려니 이해해준다. 괜히 휴학만 5년 하고 띵가띵가거린게 아니다. 아마 일평생 휴학생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매년 휴학계를 날렸으리라.


하지만 이제 졸업해버려서 휴학생으로 살 수 없다. 다시는 대학 가면 휴학생이 될 수 있다지만 그건 거절한다. 왜냐면 대학생은 군인 다음으로 내가 여태껏 경험해본 직업 중 최악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공부하고 과제로 씨름하고. 거기다 나의 전공은 무시무시한 조별과제 많기로 소문이 자자한 학과였다. 그리고 졸업하면 "어디 취업할 거야? 좋은데 취업해야지?"라는 당연한 압박도 덤이었다.


내가 어떻게 4년이나 대학생일 수 있었나 모르겠다. 하여간 다시는 휴학생 일순 없지만 휴학생 마인드로 살 생각이다. "이때 아니면 언제 경험해 보겠어요? 다 식견을 넓혀보는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내일 망할 것 같이 최대한 안일하게 살아볼 작정이다.




KakaoTalk_20190530_103327938.jpg 여기는 횡단보도에 신호가 잘 없다. 그래서 자동차 빨간불을 보고 건너야 한다. 삐뚤어지게 살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외국인은 휴학생보다도 더 좋은 직업(?) 같다. 먼저, 그 나라 말을 거의 몰라도 된다. 할 줄 아는 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이 어디예요?' 정도. 계산할 때도 물건 올려놓고 손에 돈 놓고 웃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아르바이트생이 손에 올려진 돈 중에서 필요한 만큼만 냅다 집어가 계산해줄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다 호객행위에 붙잡히는 경우 혹은 까다로운 부탁 같은걸 받았을 때도 참 편하다. No entiendo, (이해 못했어요.), No hablo español, (스페인어 못해요.), Can you speak english? (리빙 포인트: 최대한 영어도 못할 것 같은 발음으로) 이 정도만 말하면 다 거절 가능하다.


강남 건물주와 견줄만한 가장 살기 좋은 직업일 거다. 게다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도 느낄 수 있다. 새로 맡아보는 길거리와 사람들의 냄새, "이게 뭐지?" 하게 하는 새로운 문화, 피부색부터 머릿속까지 다른 새로운 사람들, 뭔지 감도 안 오는 새로운 먹거리, 부자가 된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새로운 돈, 처음 가보는 관광지, 처음 보는 이상한 제스처, 처음 해보는 행동들, 그리고 이 가운데 오롯이 새롭게 느껴지는 나 자신까지.


게다가 한국에 있던걸 똑같이 해봐도 새로운 느낌이다. 여기서는 버스는 앞문으로 탈까 뒷문으로 탈까? 내릴 때 버스카드를 터치해야 될까? 택시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밥 먹고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할까? 카운터로 가서 계산하는 걸까? 점원을 불러서 계산하는 걸까? 티브이에서 나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새로운 것들에 푹 젖어서 마치 아이로 돌아간듯한 착각에 빠진다. 매일이 모험이 된다. 이래서 내가 여행병 말기에 걸린 게 분명하다.




¡Bueno! 참 좋다. 좋은 사람들, 좋은 곳, 맛있는 음식 그리고 인정받는 것 까지.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참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29살에 겨우 학사모를 쓴 사람. 가진 돈보다 빚이 더 많은 사람. 스펙이라고 할 거라곤 토익 790점이 전부인 사람. 그것도 겨우 790점 받은 사람. 회사 경험이라고는 파이프 자르기랑 커피 뽑기밖에 안 해본 사람. 키는 작으면서도 뚱뚱한 사람.


회사에 지원한다고 내 스펙들과 삶을 쭉 나열해보면 대부분 회사에서는 나를 인생을 허비한 한심한 인간으로 볼 거다. '이 나이 되도록 인턴 한번 안 하고 스펙 하나 안 쌓으시고 뭐하고 사셨어요?' 면접장에서 뼈가 잔뜩 담긴 잔소리로 30분 상하체 골고루 두들겨 맞아도 별 대꾸 못한 채, 주먹이나 꼭 쥐며 면접장 바닥이나 쳐다볼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오니 못하는 게 없다고 해주신다. 요리 잘하는 사람. 사진 잘 찍는 사람. 친절한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착한 사람. 글 잘 쓰는 사람. 누군 이런 날보고 존경스럽다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내가 그만한 사람일까? 잘 모르겠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삐뚤어질 거면 존경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삐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삐뚤어졌다가는 바로 잔소리, 보편적인 진리의 망치로 뚜둘겨 맞게 된다. 삐뚤어질 거면 이렇게 회생 가능성도 없을 정도로 경이로울 만큼 삐뚤어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존경받는다. 나는 그 경지가 보이는 것 같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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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친구들과 온 피크닉. 한 바보 같은 친구가 이 땡볕에 루미큐브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주 성공적인 피크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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