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스페인어 콩나물.

19년 04월 06일

by Sankim




매일 아침마다 집에 나올 때마다 관례가 된 듯하는 말이 있다. "오늘도 비가 오겠네". 곧 하늘이 무너져라 비 올 것 같이 어둑어둑한 날씨지만 이 말을 하는 날은 어김없이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못 뜨는 날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더 의도적으로 한다.


이렇게 보고타 날씨는 당최 가늠할 수가 없다. 추워서 얇은 패딩이 필요하겠다 싶다가도 갑자기 햇볕이 쨍쨍해져서 긴팔 입고 온 걸 후회한다. 오늘은 날이 쨍쨍하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날씨의 신이 듣고 "힝 속았지?"라고 말하듯 굵은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날씨의 신이 그 순간 가장 짜증 나는 날씨를 선정해서 그 순간의 날씨로 정하는 것이 분명하다.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건축학과인 내 동생도 이 정도 변덕스럽지 않다. 덕분에 한 사람은 패딩을 입고 그 사람 옆에는 반바지 입은 사람이 있는 진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보고타다.


KakaoTalk_20190620_115620372.jpg 저 뒤에 변덕의 신인지 날씨의 신인지 하는 녀석이 보내는 구름이 보인다.




매일 할 일이라곤 어김없이 스페인어 공부. 보고타 날씨 변하듯 쑥쑥 스페인어가 성장하면 좋겠지만 나는 외국어라면 쥐약이다. 처음에는 스페인어가 재미있는 놀이였던 순간이 한 찰나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일이 되었다.


어찌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공부를 시작하면 시간이 가질 않는다. (똑같은 현상을 군대 훈련소에서 경험해본 적이 있다.) 수업 한지 1시간쯤 지났나 생각하고 시계를 보면 20분이 겨우 지났다. 배꼽시계는 부지런히 움직여서 지금쯤 점심시간이라고 울려대는데 핸드폰 액정에는 10시 조금 넘은 시간이 찍혀있다.


두 시계 사이 왜 이리 큰 차이가 나는 거지?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한 시간의 상대성 같은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건 물리학 법칙들에 오류가 있거나 국가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 가짐이니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코이카 소장님부터 콜롬비아 대사님, 영월 코이카 교육원에서까지 제일 중요한 건 건강 그다음이 스페인어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그 사실을 알아도 공부가 안된다. 게다가 단언컨대 스페인어보다 끔찍한 물리가 낫고 빌어먹을 수학이 더 낫다.


스페인어는 규칙 있는 척하지만 본질은 불규칙 덩어리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꿍꿍이가 시꺼먼 과목은 '화학' 다음으로는 처음 본다. 에휴. 아마 스페인어를 처음 구사한 사람은 지독하게 말 안 듣는 반 규칙 주의자이거나 어제 했던 말을 기억 못 하는 바보 천치였음이 분명하다.


규칙 사회 규범 따위를 다 무시해버리고 "오늘부터는 Tener의 1인칭은 Teno가 아니고 Tengo야. 왜냐고? 그냥 그런 기분이야!"라고 말하거나 혹은 규칙을 까먹어서 또 규칙을 새로 만들고 새로 만들고 해서 그게 뒤섞였어 버렸을 거다. 그래서 한 동사에만 수십 가지의 변형이 있고, 덕분에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기상천외한 불규칙들을 내 머리에 쏟아부어준다. 그러나 싹 다 오른쪽 귀로 들어가면 왼쪽 귀로 싹 다 빠져나온다. 어제 들은 내용은커녕 15분 전에 한 내용도 "어?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곤 한다. 그래도 콩나물은 그렇게 큰다.


콩나물은 바닥이 뻥 뚫려 있는 화분에서 자란다. 그래서 물을 부어도 부어도 곧바로 물이 다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에 물 주는 게 의미 없어 보인다. 그래도 그 의미 없어 보이는 짓을 하루에 5~6번씩 일주일을 하면 언제 물을 먹고 컸는지 쭉쭉 커있다. 내 스페인어도 이렇게 쭉쭉 크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뭐 그래 봐야 15Cm 내외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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