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정을 내리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2019.10.07.

by 비차

잘 놀고, 잘 먹고, 약 잘 챙겨 먹으면서 지낸다.

아니 정정해야지.

잘 지낸다, 라고 하기에 충분한지 모르겠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결정을 내리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진술은 단정이 되고 그로 인해 고정되어버리니까. 그건 그 이외 가능성과의 단절이다. 그러나 세상에 보편타당하며 불변하는 진리는 많지 않고, 대부분의 진리에 가까운 것들도 온전한 법칙이 아닌 학설이나 통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개인의 의견이나 감정처럼 쉽게 변화하는 것은 그 신뢰도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이렇게 가변적인 것에 대해 확정 짓고 선언한다는 것은 곧 불확실한 것에 도박을 거는 것과 같다. 서툴고 얕은 판단으로 인한 실수나 분란, 이미 선언한 말을 돌이키는 것은 몹시 부끄럽고 어렵기 때문에 나는 문제에 스스로 온전한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그것은 '모르는 것'이라 말한다. 내 생각이나 감정까지도 확신하기까지 오만가지 루트를 가정해가며 고민한다.


그러므로 대체로 나는 모르는 편이고, 이로 인해 우유부단하다거나 거절을 어려워한다거나 여지를 준다던가 신중하다는 평을 동시에 듣는다.


잘 지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는 나를 챙기는데 별달리 소질이 없는 편이어서 내 기준에서 나를 '잘 챙기는 것'은 보편적인 기준보다 한참 못하다. 그래도 급한 일은 마무리를 지었고, 일이 끊기지 않아서 돈도 나름 벌고 있고, 하루 한 끼니는 제대로 챙기려고 노력하고, 노래방에서 속 시원하게 고음도 지르고, 오락실에서 펌프를 하고, 새벽에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일찍 일어나 브런치도 먹고, 영화도 많이 보고, 소설도 읽고, 밤에는 술도 마시며 보냈다. 약도 꾸준히 잘 챙겨 먹었다... ... 깜빡한 며칠만 빼면.


예전과 비교해서 좀 달라진 점이라면 이거다. 내가 먼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찾아가 모르는 사람들을 소개받기도 하고, 그렇게 친해져서 다 같이 놀러 가자는 이야기도 꺼내 봤고, 접하지 못했던 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방식으로 어울렸다. 내가 참여하고 어울리던 이전 모임들에서 깊은 감정과 진지한 사명감이나 명확하고 비판적인 가치관으로 교우했던 것과는 또 달랐다. 간이 진한 안주와 술과 유행어와 일상과 가벼운 농담,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 낯선 사람들을 소개받으면 세상에 없던 직업이 하나 더 생기고, 세상에 없던 성격이 하나 더 생겼다. 대화 주제를 바꾸면서 장소를 이동하면, 몇 차에 걸쳐서 그렇게 변하는 주제들이 가볍고, 흥미롭고, 매력적이고, 즐거웠다. 더 가벼워질 때 풀리거나 충족되는 것이 있다는 걸 어울리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구나. 가볍고, 신나고, 얕고, 안전하고, 일상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간편하며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방법들. 내게는 신선하고 낯설었다. 입어본 적 없는 새 옷을 입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이 옷도 내게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신이 날 정도로 술을 마신 뒤에 사격 점수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일행 모두에게 아이스크림을 사기로 한 건 정말 즐거웠다.


그저 빛, 이라는 유행어가 내 이름과 같아서 깔깔 웃었다.
아,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술을 잘 마시고 맛있는 술을 좋아해.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앞으로는 무얼 할까 하는 고민을 꽤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고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나 역시도 자극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거구나, 이렇게 사는 방식이 있구나, 하는 것을 많이 배웠다. 그러면서 출판사 외주를 꾸준히 했고, 그림책 삽화 작업도 들어갔고, 중학교에 나가서 수업도 종종 했고, 몽골 사진 찍어온 것으로 이제 아트웍도 제작해야 하고, 이렇게 보면 해야 하는 것들이 참 많은데.


깊은 슬럼프 끝에 첫 단추가 다시 그리고 싶어졌다. 아니,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이번 주에는 상처 시리즈의 큰 작업도 꼭 마무리해야지. 확정된 그룹 전시 하나가 생겼다. 예전에 계획했던 Y와의 이야기를 담은 달력 일러스트는 6장을 완성했는데 10월 중에 12장을 마저 그려보고 싶고, 달력이 아니라 다이어리로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처 시리즈도 천천히 소장용 일러스트 북으로 만들고 싶다. 그새 새 스캐너를 구입해 두었으니 최소한의 준비는 했다. 영상을 만들고 싶어졌다. 가벼운 일상부터 그림 그리는 작업 과정도. 컴퓨터 프로그램부터 사회학과 철학, 영화나 예술이나 비평이나 글쓰기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이 해주는 수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게 놀랍다. 아직 모든 것을 다 할 에너지는 부족하지만.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자리가 그리 불편하지 않다. 낯선 분들이 주시는 호의는 마다하는 것이 아니라 잘 받아서 되돌려주어야지 하는 생각도 하고. 매사에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구나, 깨닫고 나서는 타인과 타인의 호의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홍대 왔다고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자고 부르면 좀 즐겁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타인을 포기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내가 만인을 다 사랑할 수는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순 없는 일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내가 처음 보자마자 불편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내가 싫은 제대로 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나는 대충 대체로 호감 가는 편인 것 같으니까 거기에 감사히 여기면서 모쪼록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가야지. 나는 자주 외롭고, 사람을 좋아해서,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가벼운 것이라도 결정을 내리거나 단절되는 것이 두려워서, 사람에게 관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놨구나, 그래서 누구든 뭐든 어떻게든 이고 지고 끌고 가려고 했던 거구나 했다. 쌓이고 쌓이면 내게 스트레스를 줄 쓰레기가 될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한 번은 쓰겠지,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하면서 예쁜 포장지를-깨끗한 박스를-봉투만 남은 편지지 세트를-쓰다 만 연습장을 버리지 못하고 잔뜩 쌓아두었던 것이 나이를 먹어서도 이렇게 나타난다. 집에 모아두었던 예쁜 쓰레기들을 얼마 전에 대청소하면서 모두 버렸다. 여태 집에 남아있는 줄 몰랐던 것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타인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 상대를 설득하거나 납득하려 들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해서 잘 정리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이것 역시 '모르겠어요'로 끝나지 않고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관계란 잘 맺는 것만큼 잘 끊는 것도 중요하다. 제대로 끊어내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이어진 것들은 꼭 좋지 않은 결과를 내더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요령 역시 시행착오를 거치며 알아가야겠지. 이십 대에 이런 것들을 깨달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그림책 프로젝트 미팅을 또 가졌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작업을 하면 더 신경 쓰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아진다. 어떤 식의 피드백이 돌아올 수 있을지 현장에서 학부모들과 접한 분들과 이야기하며 작업을 수정하다 보면 젠더나 성 역할, 섹슈얼리티,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에 대해 새삼스럽게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맞춰 외적인 개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이입이 가능할 정도의 보편을 넣고, 거기에서 피드백이 올 만한 고정관념을 토론하고 수정한다. 적절하기가 쉽지 않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예민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아직 한참 부족했구나 싶기도 하다. 원래 작업은 쉽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지. 정말로 새삼스럽지만 깨닫고, 더 예민하게 캐치하고, 더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모든 과정과 함께하는 분들이 존경스럽고.


나는 앞으로도 많은 것을 깨닫고 고쳐나가며 살 것이다. 나중에 또다시 상황이 바뀌고 또 다른 깨달음을 얻으면 이 생각 역시 후회되거나 어리석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아야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정리해두어야지.


가을비가 많이 내리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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