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500일의 썸머'의 재개봉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과연 인연이란 것이 존재할까?"
소장하고 싶은 양질의 포스터가 수천 가지나 될 법한 500일의 썸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2009년 Dramatic Feagure 카테고리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언급은 됐으나 끝내 상은 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았던 이유는 하나다. 극사실주의적으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첫 부분부터 찌질대는 감독의 자막은 약간의 유머 그리고 약간의 찔림은 덤으로 같이 얹어준다.
비록 영화의 절반 이상이 탐과 썸머의 연애 일지로 다루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러브 스토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마치 평생을 같이 해줄 것만 같았던 썸머는 돌연 탐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사이사이 나타나는 숫자는 그들이 만나고 난 후의 날들을 의미한다. 영화는 탐이 썸머를 만나고 나서부터인 일대기 순으로 진행되지 않고, 뒤죽박죽 흩어진다. 이러한 진행방식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더욱더 명쾌하게 전해준다. 우린 그 둘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예정이란 것을 알아채게 된다.
탐이 믿는 건 운명적인 만남이다.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감성 소년이다. 그와 반대로 썸머는 운명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사랑에 회의적인 여자다. 그런 둘에게 의외로 닮은 구석이 하나 있다. 물론, 음악적 취향이 비슷해서 시작된, 연애도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이긴 하지만 좀 더 영화를 보게 된다면, 둘의 음악적 취향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둘은 왜 서로에게 끌렸을까? 둘은 다르지만 비슷하다. 타지에서 외로운 썸머는 토박이인 탐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자신이 원치 않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탐도 흥이 많은 썸머가 필요했다. 결국, 그렇게 둘은 외로움에 묻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단지, 어긋난 관계임을 좀 더 일찍 깨달은 썸머가 헤어지자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은 썸머를 놓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도 같이 불러줄 수 있고, 자신을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만들어주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쁘다. 그녀가 인연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가 썸머를 잊고자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한 말이 맴돈다. "그녀를 잊기 위해서 난 그녀가 사악하고 감정도 없는 사람 혹은 로봇으로 간주할 수밖에..."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와 함께했던 바에서 노래를 부른다. 어떻게 보면 찌질함의 대명사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극강의 질척거림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썸머는 그에게 항상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우연히 동료의 결혼식에 가는 길에 마주한 썸머는 여전히 밝고 명랑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에게 커피 한 잔을 같이 하자고 말한다. 그렇게 둘은 또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그에게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금요일 밤 파티에 초대한다.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 친구도 생겼고, 프러포즈도 받았는지 결혼반지도 꼈다. 그제야 자신이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에 재빨리 그 자리에서 뛰어나오게 된다. 그러고 탐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운명적인 소녀'가 한순간에 '남의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의심 없이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좋아하는 일인 건축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그렇게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에 서게 되었을 때 마주한 운명. 혹은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준 인연으로 이름도 여름이 가고 찾아오는 계절, 가을이다. 물론 이 영화는 썸머와 탐의 러브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결론은 사랑임이 틀림없다. 물론, 우연이 아무리 여러 번 겹친다 해도 자신이 인연을 만들어나가지 않는다면 이는 우연에서 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탐은 분명 운명이 그리고 인연이 존재하다는 것을 믿는다.
영화의 묘미는 깊이 있는 목소리로 읊조리는 내레이션도 있지만 주인공 주위 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2009년도 꼬꼬마 시절이었던 클로이 모레츠의 귀여움은 당연히 영화를 한층 더 신명 나게끔 해주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어느 영화가 시작도 전에 남주와 여주의 이별을 먼저 얘기하고 시작할까? 감독은 이미 답을 알려준 채 시청자들에게 '창의적으로 답을 풀어보시오.'라고 문제를 내준 것과 다름이 없다. 결과야 어쨌든 과정은 각기 다르게 접근할 것이다. 내가 본 '500일의 썸머'는 결국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인연이란 존재한가? 그것은 아직 모르겠다. 이 둘이 내려준 결론은 인연은 우연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 우연을 마주했을 때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이 임자인 것이다.
여름이 다가온 이 시점에서 '500일의 썸머'가 재개봉한다는 데에 난 적극적으로 찬성이다. 시원한 극장에서 쿨한 썸머의 이별은 한층 더 싸하게 해주는 효과가 지극히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죠셉 고든 레빗의 특출 난 연기로 인해 탐이 전혀 찌질하지 않고 순정남으로 보이게 만드는 역효과까지 볼 수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