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자체가 '스틸 플라워'
영화는 시작부터 하담의 뒤만 쫓는다. 부스스한 머리에 캐리어 하나를 끌고 다니는 그녀가 약간은 음침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절반쯤 가본다면 그녀가 왜 그리 어두운지 대략 짐작은 갈 것이다. 부모님도 집도 아무것도 없는 그녀에게 유일한 자산은 캐리어 가방과 그 안에 든 게 전부다. 그런 그녀에게도 확고한 신념이 있다. 일한 만큼 벌어서 먹고사는 것.
하지만, 연락할 번호도 집주소도 없는 그녀에게 일을 구하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와도 같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가 유일하게 반기는 건 탭댄스 학원에서 흘러나오는 구두 굽소리. 탭댄스의 경쾌한 리듬은 그녀로 하여금 지친 하루를 신나게 마무리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하루하루 벌어먹고사는 그녀 주위에 있는 어른들은 노동력만 착취하는 나쁜 사람들뿐이다. 1시간만 전단지를 주고 있으면 돈을 준다던 아주머니도 횟집 사장님의 첫 호의도 잠시 나중에는 막무가내로 나가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얻은 빈대떡집 알바도 결국 횟집 사장의 전 애인으로 인해 사라지고 만다.
그녀에게 탭댄스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아마 그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낙이라고는 없는 그녀의 삶 속에 '따닥'거리는 소리는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이어준다. 오로지 혼자가 될 수 있는 시간. 달동네에서도 가장 위에 위치한 쓰레기 더미에 있는 집일지라도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는 걸음걸이. 비록 악착같이 아줌마를 찾아가서 돈을 받아내야 하고, 횟집에서의 횡포를 단순히 활어를 바다로 보내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던 그녀의 분노는 탭댄스 한 번으로 녹아내린다. 그녀에게 있어 '삶'이란 아직 미련이 남아 끈을 놓고 싶지 않은 어떠한 힘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암담하기만 한 그녀의 삶에도 빛은 존재했다. 물론 정신적인 의미로 탭댄스가 있고,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집에서 비추는 촛불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희망의 언어가 아닌 실질적 빛이 영화 속에도 존재한다. 빈대떡집 사장님이야말로 그녀에게 삶을 쉽사리 놓칠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과 같다. 그러나 이 또한, 질긴 악연으로 알바를 잘리게 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그녀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파도가 치는 갑판장이다. 거기서 그녀는 탭댄스화를 신고 반은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춘다. 이에 화답하는 듯이 파도도 힘껏 일렁인다. 이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녀의 생사 또한 불투명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담이 카메라를 응시할 때 필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마치 눈으로 그녀는 무언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힘내라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힘껏 춤을 춰봐'
영화에서 알려주는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일식집에서 치른 면접이 전부다. '정하담'이라는 이름과 '22'이라는 나이. 그리고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 속에서 넌지시 말해주는 그녀의 성격은 고집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억척스러우면서도 여리다. 그녀 자체가 '스틸 플라워'임을 보여준다.
그녀가 마주한 세계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힘내라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힘들어도 어디 피할 곳도 있지 않은
깊숙이 들여다보면, 우린 슬픈 인생을 응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하담은 탭댄스라는 소박한 행위 하나에서 행복을 찾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지키면서 나름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한다. 신발을 훔치는 와중에 돈을 놓고 가는 것처럼, 마지막 자존심을 내어주지 않는다. 험란한 세상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는 게 삶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우리가 지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하담처럼 소소하게나마 충족시킬 수 있는 행복의 의미를 찾았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하담은 실제 주연 배우의 이름을 따서 사용됐다. '여름 연못'이라는 의미로 그녀는 이 배역을 맡았을 당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게다가 인터뷰 당시, 그녀의 옆모습, 뒷모습과 같이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도 애잔함이 묻어 나오지 않은 것 같아 상당히 아쉬워했다. 그런 그녀를 라디오 스타에서 이해영 감독(페스티발, 천하장사 마돈나)은 어마어마한 배우라고 말한다. 검은 사제들에서 무당 역을 맡은 바 있고, 근래에 개봉한 아가씨에서 하녀로 나온 적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배역을 할 것이다.' 그런 그녀의 행보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