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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울싸람 May 23. 2021

아무것도 안 했는데 유죄입니다.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좋아했던 대학 동기 Y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실하지 않음에 죄의식을 갖는 것 같아. 부지런한 건 훌륭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뭐가 어때서?" 민족성이 부지런하다 인정받는 우리나라에서 자라온 사람이 듣기엔 매우 인상 깊은 한마디였다.


Y는 수업에 지각이나 무단결석을 하는 불성실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부지런하다는 인상도 없었다. 술 한잔 한적도 없을 만큼 개인적 친분은 없었지만 Y를 좋아했다. 수업 과제 때문에 며칠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좋아하는 영화나 반려묘 얘기를 할 때 자존감이 높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Y는 상대를 편하게 해 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었다.


다른 동기의 결혼 때문에 오랜만에 Y와 연락이 닿았다. 솔직히 그와의 추억보단 (사실 없다), Y의 그때 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 이는 철저히 최근의 내가 부지런하지 않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인듯하다.


요즘 일상은 정말로 별게 없는데, 예를 들어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씻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 눕기 시작한다. 양말을 신은 채 발을 침대 밑바닥에 대고 오늘은 어떤 재밌는 영상이 올라왔나 너튜부 세계를 서핑한다. 그러다 완전히 이불속에 들어가고 싶어질 때쯤 씻고 돌아와 알람을 맞추고 폰을 보다 잠에 든다. 그렇게 평일이 지나면 친구들을 만나 맥주 한잔을 하다가 배 아픈 소식을 듣는다. 누구는 부동산을 공부하다가 벌써 자가를 마련했다더라, 누구는 부업으로 시작한 쇼핑몰이 대박 났다더라, 누구는 퇴근 후에 MBA를 준비한다더라, 누구는 주식이나 코인으로 벤츠를 뽑았다더라.


그때부터 미친 듯이 몰려오는 배아픔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온다. 동시에 이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못난 회피를 시작한다. 누구1은 애초에 부동산에 투자할 자금을 집에서 줬겠지. 누구2처럼 쇼핑몰 때문에 스마트폰에 묶인 삶 못살지, 완전 남 의식에 찌든 삶일 텐데. 누구3은 와이프가 미국 MBA를 먼저 간다고 했으니 처가에서 같이 보내준다고 했겠지. 주식은 몰라도 코인은 진짜 도박 아닌가, 누구4도 나중엔 큰 코 다칠 텐데. 이런 못난 투덜거림은 '퇴근하고 뭐라도 해볼까..' 생각으로 잠시 이어지다가도 얼마 못가 또 스마트폰을 켠다.


오늘도 신나게 스마트폰 세상을 여행하다가, Y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요즘 뭐하냐는 질문에 특별한 건 없다는 안부를 시작으로, 그의 부지런하지 않음에 대한 한마디가 머리에 맴돈다고 전했다.


“너 기억나냐? 네가 부지런하지 않은 것 같고 왜 뭐라 하냐고 했던 말. 요즘 내가 집-회사만 해서 그런지 그 말 생각이 많이 나더라. 게으르게 살면서 너 말로 괜히 합리화하고 있는 것 같어. 신세 지고 있다.”
“내가 그런 말도 했어? 근데 네가 게으르다고? 난 너 뭐 할 때 뭐든지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과제 하나 하겠다고 인터뷰도 따고 난리도 아니라 생각했지. 밤도 자주 세지 않았어? 쉴 땐 쉬어~ 병들어.”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회사도 근처니 코로나 끝나고 맥주 한잔하자는 흔한 끝인사로 통화를 끝냈다. 그러곤 눈을 감고 평소의 본인에 대해 돌이켜봤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남에게 미룬 적도 없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밤을 세거나 주말에도 일을 하기도 한다. 성과를 인정받아 그에 맞는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때도 있고, 전세대출금을 제외하면 부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주어진 일이라면 시간과 노력을 쏟고, 나머지 시간을 쉬는 것인데, 나는 게으른 것인가? 나는  아무것도  함에 있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사실 상기 언급한 '누구'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말이 전해지며 퇴색됐을 뿐, 그들의 결과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있었다는 걸 안다. 단지 노력과 결과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자신이 싫었고, 그렇다고 욕심을 버리고 지금에 만족하지도 않는 자신이 죄스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책을 멈춰야겠다. 가만히 누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죄의식을 느낀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죄를 피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현재에 만족하고 살든가, 혹은 더 나은 결과에 대한 욕구를 발판 삼아 그에 맞는 행동을 시작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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