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의 김그래가 스물다섯의 김그래에게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스물다섯 살이고 쉽게 상처 받고 작은 일에 멘탈이 바스러지다가도 특유의 근성과 승부욕으로 아득바득 잘 해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예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좋아하는 후배다. 무엇보다 스물다섯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다. 벌써 얼마나 컸다고 그러겠느냐만은, 그래도 3년 전보다 한 뼘쯤 더 성장하고 보니 그 친구의 감정적인 면,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되는 감정 기복에 공감이 된다. 더 신경 써주고 싶다.
그때는 스물여덟 먹은 언니의 말 한마디가 큰 위로나 조언처럼 들리기도 했으니까. 나는 같이 욕하고 뜯고 씹고 즐기는 동기 같은 언니보단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선배 같은 언니가 되고 싶다.
그 친구는 발레를 전공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 현대무용으로, 현대무용에서 한국무용으로 전과를 했다고 한다. 대학 댄스크루에도 들어가 락킹을 추면서 원밀리언댄스스튜디오의 강사로 활동했다고 했을 정도니, 춤 실력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부끄럽다고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아서 좀 아쉽다)
그런 친구가 마케팅을 하고 기획을 한다.
스물넷 평생을 춤만 추다 사무직 일을 하려니, 그 친구에게는 미생 속 장그래가 바로 본인 얘기 같았을 거다. 나 역시 초년생 때는(지금도 초년생이라면 초년생이지만) 장그래에 이입해 '그래, 난 김그래야. 김그래 화이팅! 할 수 있어 아자아자!'를 수백 번 외쳤으니. 두부 같은 멘탈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영향받고 고민하는 그 친구가 김그래 역할극에 빠지지 않았을 리 없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도 김씨다.
그 친구가 이제 두 번 다시는 춤을 추고 싶지 않다고 한다.
아니, 발레에서 현대무용, 한국무용으로, 원밀리언에서 강사를 했을 정도로 다양한 춤을 섭렵했는데 도대체 왜?
"취미로라도 싫어?"
"응. 못하겠어."
매번 그 이유를 물을 때마다 “대학 때 많이 해봐서", "몸이 망가져서"라고만 답하기에 조금 싱거운 이유라고 생각했다. 뭐, 아니면 무용으로는 비전이 안 보인다거나 너무 질려서 쳐다도 보기 싫다거나 그런, 한평생 책상 앞에 앉아 문과 인생만 살아온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이유와 고충이 있겠거니 했다.
"사실은... 내가 정말 존경하고 따르던 선생님이 있었어."
지하철 퇴근길에 무심코 "근데 너 왜 춤 안 추는 거야?"라고 단순 무식하게 했던 질문을 또 물어본 나는, 오늘 의외의 답을 들었다. 언제나 어느 자리에서나 그 친구를 불러주는 스승님이었는데, 그 친구도 진심을 다해 따르던 스승님이었는데, 더 무용을 잘하는 어린 친구가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연락을 뚝 끊었다면서. 그런 경험이 한 번 두 번 쌓이다 보니, 무용이란 경쟁 세계에는 더 이상 발도 들이고 싶지 않다고, 정거장이 을지로 입구4가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향하는 짧은 사이에 번개처럼 후다닥 말해주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가볍지 않은 문제였다.
그 친구는 경쟁에 지쳤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에 지친 것이다. 믿음에 지친 것이다. 한때 발레 센터에 섰을 정도로 재능 있던 친구가 춤이란 걸 아예 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상처가 있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결국은, 또 사람이구나.
스타트업이 망하는 90%의 이유는 경쟁 업체 때문이 아닌 내부의 불통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평범한 직장인이 회사를 괴물의 입속처럼 생각하는 이유도 대부분 사람과의 마찰 때문이다. 사실 업무 자체보다는 그 업무를 처리하는 상대의 방식, 나를 대하는 방식, 말투,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갈등이 비롯된다. 사람이 사는 데 중요한 건 배려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배려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말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리막길을 후다닥 걸어 내려오다 툭 튀어나온 아스팔트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엄지발톱과 발가락 살 사이가 깊게 째져 피가 철철 흐르고 웨지 신발에 피가 까맣게 스며들었는데, 우선 출근이 먼저라 생각해 지하철을 타고 회사 앞까지 갔다."출근하다 넘어져서 엄지발가락이 찢어지는 바람에 걸음이 느려져서 5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ㅠㅠ"라며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우리 상사 하는 말이, "아니!!! 피까지 난다고요? 민우씨한테 병원 데려가 달라고 할게요. 일단 회사로 와 봐요."
회사에 갔더니 다들 깜짝 놀라며 어떻게 이런 상태로 왔냐며, 왜 병원부터 가지 않았냐며 덜렁덜렁거리는 내 엄지발가락 살을 보고 걱정과 타박을 쏟아냈다. 한 분은 곧바로 가까운 외과를 찾아 주셨고, 민우씨는 정말로 회사 차량으로 나를 망원의 병원까지 데려다주셨다. 병원을 알아봐 주는 본부장님과 나를 차로 이동해주는 민우씨와 환자인 나.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았다. 민우씨는 주차할 데가 마땅하지 않아 진료가 끝날 때까지 주위를 뱅뱅 돌며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세상에 무슨 이런 회사가 다 있지?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어느새 1년 3개월이 지났다.
힘들고 어려운 일, 술이나 먹으며 잊어 보자 하는 그런 패배의 날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회사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건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물다섯 김그래도 그중 한 명이다. 한밤중에 전화해 고민을 털어놓는 모습까지 예쁘고 사랑스럽다.
나도 병원을 알아봐 주는 본부장님처럼, 병원까지 운전해 데려다주는 민우씨처럼, 당장 병원부터 가라며 업무 올스탑을 한큐에 결정해버리는 우리 상사님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열심히 노력 중인데 잘 되고 있나 모르겠다.
분발, 분발, 분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습관의 영역임을 잊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