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 갬빗의 전환점은 5화에 있다
어느 날 영상 감독님이 퀸스 갬빗을 추천하셨다. "제가 중점적으로 봐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가수들과 레이블의 세계관을 구상하고 있던 나는 스토리 차원에서 추천해 주신 거라 생각하며 여쭤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 감독님의 말씀이 "그냥 보세요"였다.
1화는 따분했다. 느리고 음산한 음악. 미스터리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천재 체스 소녀 베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내용. 호흡이 길고 극적인 감정 변화 따위는 없었다. 1화의 끝에서, 베스가 조그만 창구 속으로 기어 들어가 알약을 입속과 주머니에 마구 집어넣는 장면이 나오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고아원 원장에게 들키고 베스가 쓰러지면서, 나는 순식간에 집중하게 됐다.
그 이후로 사건은 화살처럼 흘러갔다.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베스의 여정이 그려졌다. 지루하기만 했던 사건도 한 번의 충격적인 전환점 이후 흥미진진하게 변했다. 부모도, 친구도 없던 베스가 알약에 의존한 나머지 알약을 모두 먹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그 장면이 몰입의 트리거가 된 셈이다. (실제로 50년대 당시 미국에선 고아원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진정제를 의무적으로 투여했다고 한다.)
소설 원작인 이 시나리오를 스튜디오 제작사에 팔기까지 무려 30년간의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30년의 세월에 걸맞은 멋진 스토리였으나, 나의 시선을 한 번 더 확 잡아당긴 장면은 5화에서 나왔다. 오래전, 베스가 난생처음 체스 시합에 나가 콧대를 확 꺾어버렸던 전 주(州) 챔피언 해리가 나타나면서부터다.
체스의 여왕이 된 베스를 불쑥 찾아온 옛 경쟁자는 무턱대고 수십 권의 책을 건넨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이 감명 깊었고 베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열정적으로 쏟아낸다. 그러다 베스의 제안으로 동거를 시작한다. 수십 번, 수백 번 그녀의 게임 상대가 되어 주고 마침내 자신은 그녀의 실력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고 말한다.
난 체스를 사랑하지 않아.
체스만 파고들지도 않지. 최고가 되려면 필수인데. 너처럼.
베스의 집을 나서며, 그가 던지는 말이다. 그의 말과 함께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한때 주 챔피언까지 했던 사람이, 오래 전의 승부를 기억하고 그녀를 찾아와 열정적으로 체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수백 권의 책을 탐독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내 머릿속에는 이 장면만이 잔상처럼 남았다. 해리가 냉철하게 현실을 인정하는 부분에서, '천재'조차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가 쓰라린 실패를 겪었던 참이었다. '나는 아닌가 봐'라는 자책에 빠져 있었다. 5개월간 노력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것 같은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해리의 말이 각성제가 되어주는 듯했다. 천재도 아닌 내가, 천재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또 쓸데없는 감정의 감옥에 빠져 있었구나 싶었다.
베스도 마찬가지 각성을 내게 주었다. 그녀는 천재라는 타이틀을 얻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체스 시합이 끝나면 이긴 경기일지라도 반드시 복기하며, 비행기 안에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잠드는 순간까지 체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녀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체스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봤다. 그 누구에게서도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체스에 더더욱 몰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대상이 있더라도, 보통은 그 대상에 그녀만큼 몰입하지 못한다.
베스는 그저 머리가 비상하기 때문에 체스를 잘 둔 것이 아니라, 노력했기 때문에 챔피언이 된 것이다.
누군가는 퀸스 갬빗을 천재의 삶을 그린 드라마라고 말한다. 고독한 천재 베스가 입체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혹은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당당하게 동등한 지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한 여성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저 '노력하는 천재들'의 이야기였다. 기댈 곳 없는 고아 소녀가 새엄마에, 알약에, 체스에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지탱했다는 의미까지 읽어내기에는, 내게 너무 버거운 드라마였다.
다시 패배감에 젖으려 할 때마다 나는 해리의 말을 떠올려보려 한다. 평온한 표정으로, 이성적인 표정으로 체스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해리의 눈빛을 생각해보려 한다. 지난 5개월을 쏟아부은 그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난 너무 게을렀던 것 같다. 더 노력한 뒤에 그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