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
새벽 3시. 눈은 말똥말똥 정신도 말똥말똥. 당최 잠이 오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뒤면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도쿄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수학여행 전날 설렘에 밤잠 못 이루던 열두살 때처럼 나는 은근하게 두근거리는 맘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2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그 새벽에 20분 동안 고데기로 머리도 예쁘게 말았다.
신랑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김포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하신 부모님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부모님을 만나기도 전부터 짜증 버튼이 꾹 눌렸다.
보딩 1시간을 남긴 시점에서 막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나에게, 엄마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것이냐며 날선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엄마 입장에선 불안할 수도 있는 건데, 난 지레 걱정부터 하고 보는 엄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비행기 한두번 타보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애기처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비행기를 열댓번을 탄다 해도, 부모님 나이쯤 되면 일상의 꽤 많은 순간에 아이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마음 넓게 헤아리지 못했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만났고, 무사히 밥을 먹었고, 무사히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첫날은 시간이 어떻게 흘렀나 모르겠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정신없이 고속열차 티켓을 발권받고, 캐리어는 엄마한테 하나, 아빠한테 하나를 맡긴 채 나는 가벼운 몸으로 총총 호텔을 찾아갔다.
임신한 몸만 아니었다면 캐리어 하나는 내 몫이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은 아가가 자라고 있는 배를 어루만지니 죄송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참 이기적이고 못된 딸인가 보다.
호텔이 있는 롯폰기역.
엘리베이터가 있는 출구를 미리 알아놨으나 그냥 무작정 아무 출구로 나와버렸다.
3년 전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끝내 건강해진 아빠가 캐리어 두 개를 번쩍 들고 계단을 오르셨다.
그땐 마음이 좀 짠했다.
임신한 몸만 아니었다면 캐리어 하나는 내 몫이어야 했는데...
죄송스러웠다.
나는 일본을 꽤 여러 번 방문해봤다.
서너 번 여행으로 찾았고, 작년부터 올봄까지 세 번 정도 출장을 다녀왔다.
여행으로 왔을 때는 잘 알지 못했던 일본의 이모저모를, 출장길에 동행한 경희님께서 상세히 알려주신 덕에 나는 '어깨너머로 배운' 일본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며 엄마 아빠에게 아는 지식을 신나게 방출했다.
엄마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살아온 세월의 눈썰미로 일본인들 특유의 문화를 금방금방 캐치해내셨다.
정보전달 반 자랑 반 섞인 나의 재잘거림에는, 사실 부모님과 지금 순간을 100% 공유하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가득 담겨 있었던 것 같다.
호텔에 짐을 푼 뒤.
부모님을 이끌고 롯폰기의 샹젤리제, 롯폰기힐스와 모리정원까지 20여분을 걸어갔다.
가는 길에 참 웃겼던 일화가 있다.
블로그에서 본 맛집을 찾아갔는데 웨이팅이 별로 없어 땡 잡았다며 줄을 섰다.
그때 도로를 가득 메우고 들려오는 한국말 소리.
알고 보니 웨이팅이 이어지다 못해 맞은편에까지 한국인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가 줄이에요"라는 한 젊은 분의 말에 민망해하며 또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며,
"엄마, 아빠, 이건 아니다"라며 바로 옆집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새삼 한국인들 대단하다고 느꼈다.
배 나온 임산부인 나 역시, 한참을 서 있느라 지겨웠을 그들에게 잠시잠깐의 재미난 구경거리가 되어줬기를.
모리정원에선 디올이 기획한 일루미네이션 이벤트가 한창이었고 주위엔 온통 20대 30대 뿐이었다.
릴스이지 틱톡인지를 찍는 10대들도 많이 보였다.
"애들이 어쩜 이렇게 다 이쁘니?"
"우리가 제일 늙었어ㅎㅎ"
라는 엄마 아빠의 수더분한 대화를 들으며, 또 디올이 기획한 이벤트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고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보는 귀여운 엄마 아빠를 보며,
이 시간이 부모님께 소중하고 귀한 추억이 되기를 속으로 진심으로 바라보았다.
둘째날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하는데... 데이1에서 데이2로 넘어가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아, 나는 엄청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아빠의 천둥 같은 코골이 소리에 잠들지 못한 것이다.
새벽 6시쯤 잠이 들어 8시에 눈을 떴다.
이 상태로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간 나도 배속의 아가도 제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결국 10시까지 더 눈을 붙였고, 엄마 아빠는 잠든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호텔 방에 친히 '갇혀' 계셔주셨다.
"이 동네는 죄다 젊은애들에 어디 나가도 빌딩들 뿐이라 못 나갔어~"
잠에서 깨자 엄마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사카 여행을 갔을 땐, 엄마가 잠든 나를 두고 호텔 밖을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왠지 엄마한테 미안해졌다.
현지의 느낌을 오롯이 경험하고 싶어하는 부모님의 취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일본의 전통시장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표 관광지 아사쿠사.
그런데 불현듯 엄마 아빠에게 일본식 찻집 킷사텐을 경험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살짝 틀어 아사쿠사역에 내리기 전, Der Koffer 라는 카페를 찾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에 조그만 공간에 알차게 들어선 소파들, 그리고 자리를 가득 채웠으나 조금도 시끄럽지 않은 일본 사람들의 소박한 말소리.
예스럽고 정겨운 분위기가 풍겼다.
우리는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코코아, 쇼콜라와 함께 팬케잌을 시켰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던 이틀간의 여정에 편안함과 노곤함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모처럼 한적한 도쿄 거리를 만난 엄마 아빠를 위해 걸어서 아사쿠사까지 가기로 했다.
고즈넉한 골목을 만나고, 노란 뿔이 인상적인 아사히 본사를 지나치고, 스미다 강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 컷 찍었다.
촘촘하게 짠 일정만 아니었다면 엄마가 좋아하는 스미다구의 골목 이곳저곳을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녔을 텐데.
이것 또한 혼자만의 아쉬움과 후회로 남아 있다.
그렇게 도착한 아사쿠사까지 정신없이 즐기고 나니 오후 4시.
데이2의 일정도 어느새 절반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