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달 이전의 열 달 이야기
정말 아기를 낳고 싶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우리 애기 갖자"고 신랑한테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회사 진급 시험을 앞두고 있던 신랑은 공부가 끝나는 6개월 뒤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뾰루퉁해져서 툴툴대다가 다음날이면 "애기는 언제쯤?"이라고 또 다시 신랑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면 신랑은 이러고 저러고 해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적절한 상황과 타이밍을 계획하자며 슬기롭고 단호하게 '대처'했다.
돌아보면 대학 시절부터 무턱대고 "우리 결혼 언제쯤?"이라고 외치던 나의 습관성 생떼가 '아이 낳기'로 한 단계 진화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정말로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이 왔다.
1년 사이 나의 정신적인 성숙도 꽤 무르익었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기를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희생과 인내를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났으니 정말 아이만 오면 될 것 같았다.
산전 검사를 받았다.
생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호들갑을 떨며 배란 테스트를 해보고, 남들의 임신 일지에 함께 설레며 이 일에 꽤 부지런을 떨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렀다.
나의 광활한 호르몬 세계에선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간혹 두세 달 만에 임신에 성공하면서 '생각보다 임신이 잘 되지 않더라'는 어떤 이들의 후일담이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 즈음.
담당 선생님의 권유로 배란 유도제를 먹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병원에 들려보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병원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한 젊은 부부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병원에 들어섰다.
"출산하러 왔는데요."
저게 말로만 듣던 출산가방이란 건가?!
아, 유도분만은 저렇게 뚜벅뚜벅 두 발로 걸어들어오는구나.
예전엔 신기하기만 하던 일들이 이제는 질투가 되어 나는 서러움을 끅끅 삼켰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러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배 나온 임산부에게 뒷좌석 아주머니가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핑크색 뱃지를 단 임산부가 내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 채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보다 못한 뒷좌석 아주머니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앉아있던 자리가 임산부석이란 걸 깨달았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부리나케 일어났지만 어찌나 쪽팔리던지. 어찌나 초라하고 쪼그라들던지.
부러워 부러워 부러워.
속상해 속상해. 왜 나만.
이런 슬픈 말을 수백 번은 삼켰다.
임신 준비 8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문득 해본 임신 테스트기에 희미한 두 줄이 떴다.
다음날 다른 테스트기를 갖다대보아도 비슷하게 희미한 두 줄이 보였다.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피검사를 받고 '일단' 임신이라는 희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정상 임신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우리 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호르몬은 정상궤도에 올라 한 달에 한번 여자들이 마주하는 마법으로 변했다.
생전 처음 '화학적 유산'이라는 단어를 접해보았다.
심장 소리나 아기집이 아닌 피검사와 같은 화학적 방법으로 임신을 확인하는 걸 뜻한다.
모르고 지나가면 그냥 생리가 되는, 통상적인 유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설레발치지 말걸. 그냥 모르고 지나칠걸.
남녀가 만나 인체의 신비가 빚어내는 마법을 간절히 꿈꾸던 나는 병원에서 훅 떨어진 임신 수치를 확인하던 날, 벌컥벌컥 술을 마시며 눈물을 씻어냈다.
목젖에 밀어넣은 건 술이지만 마음 가득 삼킨 건 허무함, 억울함, 한. 뭐 이런 감정들이었다.
며칠 뒤 100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간절히 원하는 한 문장을 매일 100번, 100일 동안 쓰는 혼자만의 의식 같은 거였다.
나는 2024년 12월, 남편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아기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고등학교 이후로 이렇게 빨리 펜심이 닳도록 펜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수첩을 대여섯 개 바꿔야 했다.
손목이 아파 그만두고 싶고, TV 예능이 재밌어 좀 미루고 싶고, 여행을 다니느라 하루쯤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모든 귀찮음, 피곤함은 내 간절함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벽까지 일을 할 때에도 닳고 닳은 수첩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30일쯤 지났을 때 드디어 기적처럼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태명은 랑랑으로 정했다.
아기집과 난황, 아기의 심장소리를 확인한 뒤에도 나의 글쓰기, 아니 소망은 멈추지 않았다.
100일이 지나고서야 나는 마음 편히 펜을 내려놓고 배를 토닥거리며 '잘 있어줘서 고마워' 하고 말했다.
열 달 동안 랑랑이를 품에 안고서 기대에 벅찬 날들을 보냈다.
아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임산부였을 것이다.
출산 날, 두 손 가득 무거운 출산가방을 들고 뚜벅뚜벅 병원으로 걸어들어갔다.
손을 꼭 잡은 신랑과 배부른 나 사이, 거기에 50cm의 작은 랑랑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이제 평생을 우리 사이에 가로놓일 그 작은 존재에게 애정을 듬뿍 담아 인사했다.
우리 곧 만나자. 사랑해.
그렇게 아직 오지 않은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할 우리 세 사람의 크리스마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