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 독립의 단맛

초보 밥상러의 일기

by Seri Kim

엄마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날까지도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유부초밥과 육개장,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돼지 불고기와 시장에서 사다 놓은 김치가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오늘 밤 밥을 하고 저어 놔야 내일 찰진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신신당부했다. 급기야 쌀을 물에 불려 밥통에 안쳤다. 시간이 없어 못다 한 걸레질도 꼭 해야 한다더니 결국 아빠를 시키셨다. 내가 못 미더워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돼야 본인 마음이 편한 것 같다. 평소라면 잔소리로 넘겨버렸을 얘기들도 기분 좋게 귀담아 들었다. 집 밖을 나가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처음으로 혼자 집에서 보내는 4박 5일이 시작됐다. 세상에. 이렇게 기쁠 수가.


집에 홀로 1박 이상 있게 되면 새해 첫날 같은 기분이 든다. 새해, 새 출발, 새시작 같은 느낌이다. 다이어리를 사고 올해의 목표를 생각나는 대로 쓰지 않나. 그리고 가장 윗단에 있는 것을 실천한다. 나에게도 막연하게 그런 리스트가 있었다. 새벽에 소리 크게 키우고 티비 보기, 친구 불러 놀기, 넓은 거실에서 넷플릭스 보며 혼술하기. 그런데 의외로 첫 번째로 한 일은 대청소였다. 내 방을 시작으로 온 집안의 먼지를 빨아들이고 닦고, 정리까지 했다. 우선 내 방 책장을 청소 및 정리하는 데 하루를 소진했다. 다음날에는 거실과 주방을 청소하고 그다음 날에는 안방과 나머지 방을 청소했다.


2년 전 이사를 온 직후부터 ‘정리에는 큰 관심이 없고’ 쓸고 닦는 청소에 능한 엄마의 집안 관리 시스템에 ‘청소에는 소질이 없지만’ 정리에는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난 일찌감치 집안일에 손을 뗐다.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하거나 가끔 청소기를 돌리는 정도. 1년에 한 번쯤 집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정리하는 정도. 퇴근하고 오면 있는 대로 어지럽히면서 속으로 ‘이 집은 포기하자’고 체념했다. 어렸을 때부터 집 꾸미기는 내 소소한 재미였다. 인형 놀이를 할 때도 직접 박스를 조립하고 색종이를 오려 붙여 인형의 집을 만들었다. 밤에는 정원부터 나무 위 간이 오두막까지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하다가 잠들었다. 나만의 드림 홈을 갖게 되면 정말 최선을 다해 꾸며야지. 계획은 항상 다음, 다음, 다음으로 미뤄졌다.


그런데 혼자 집을 독차지할 기회가 생기자 없던 책임감이 생겼다. 음. 이게 독립의 맛인가. 그렇게 귀찮아하던 설거지도 뭘 먹었다 하면 싱크대 앞으로 달려갔다.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통도 다른 것으로 갈았다. 이건 좀 심한데 나중에는 머리카락 한 올만 보여도 쓸어 담고, 거실에 발바닥 자국이 보이면 슬리퍼로 문질러 닦았다. (참고로 청소 로봇이나 식기세척기보다 손걸레 대신 짜주는 기계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누가 특허 좀 내줘라.)


나흘의 시간은 나에게 독립 미리보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오랫동안(응?) 집의 주인이 된 적은 없었다. 일용할 음식이 넘쳐나는데도 굳이 장을 봐서 야식을 해 먹었다. 청소도 설거지도 요리도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는 의식에서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재밌었다. 물론 독립의 단맛은 나흘이라는 시간적 제약 덕분이었으리라.


리스트에 올려 뒀던 것들을 더 창의적으로 해봤다. 새벽에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마이크 잡고 노래도 불렀다. 친구 불러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념 밥+스크램블 에그+베이컨 주먹밥에 (사실 보드카 맛만 나는) 하이볼도 만들어 차렸다. 넷플릭스를 티비에 연결해 영화 보는 것도 모자라 게임까지 했다. 큰 화면으로 하니까 스릴 만땅. 이 좋은 걸 이제야 알다니.


밥상 차리기


고작 4박 5일 보내고선 독립을 입에 올리는 게 민망하다. 수많은 1인 가구의 눈에는 소꿉놀이로 보이겠지. 하지만 내게 이 기간은 절대적인 의미가 있다. 내 집에 책임감을 느껴보는 것,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지인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 아끼는 그릇을 골라 음식을 대접하는 것, 원하는 시간에 먹고 자는 것, 그리고 취미를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다 지금이 아니라면 몰랐을 것들이다. 이제 취미를 물으면 “카트라이더 게임이요”가 아니라 “티비에 연결해서 카트라이더하는 거요”라고 말할 수 있다. 고유 명사만 들으면 감흥이 덜하다. 이미지가 떠오르면 임팩트가 커진다.


부모님이 돌아오는 날, 손님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설레고 난리. 엄마 아빠 얼굴도 반갑지만, 나만의 감각으로 꾸미고 엄마 마음에 쏙 들게 청소한 우리집을 얼른 보여 주고 싶어 난리. 지금 내 방을 제외한 거주 공간들은 (내 기준으로) 다시 엉망이 되어 가고, 이제 머리카락 한 올만 보여도 히스테리를 부렸던 나의 결벽증적 증세도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그 단정한 기분만은 잊을 수 없다. 아, 4박 5일 독립의 단맛, 그 산뜻한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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