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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식 Jan 24. 2021

영화 <이탈리아 횡단밴드>와 시절 인연

Papaleo - Basilicata on my mind

그래서 삶이 대체 무엇일까? 세상 사람 대부분이 먹고사는 궁리에 빠져 있는데 이런 걸 궁금해하는 인간들이라면, 높은 확률로 바보일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그 바보 중에 하나고, 저 질문에 가장 침잠해 있던 건 스물넷 언저리였다. 졸업반이 된 동기들은 각자 임고 준비나 취업 준비에 한참 매진하고 있었는데 나만 엉망인 채 그 자리였다. 도대체 삶이 뭐길래 이렇게 버텨가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봉합하지 못한 지난 상처와, 새롭게 마주해야 했던 인생의 불온함에 매일매일 고통받고 있었다.


그 옆엔 두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인생의 불온함은 훌륭한 안주가 되어주었고, 늘 취해있던 우리는 언제나 셋이 기본이었다.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적어도 들어줄 수 있는 건) 서로 밖에 없다는 그 이상하고도 외로웠던 연대가, 서로가 서로의 삶에 함부로 침범하도록 했다. 도저히 분리가 안 되는 지경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몇 개월을 보내다 깨달았다. 이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걸.


그 시간들을 견디게 해 준 친구를 떠나보내야만 다시 견딜 수 있다는 삶의 아이러니. 이 친구를 놓으면 겨우 위태롭게나마 유지하고 있는 균형마저 깨지는 게 아닐까 몹시 불안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시간을 통과할  있었던 , 삶이 무엇일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하던  영화였다.

로코 파팔레오 감독의 <이탈리아 횡단밴드>


간간이 밴드 활동을 지속해오던 주인공들은, 어느 여름날 10년 만에 밴드의 재결성을 다짐한다. 이탈리아 남부의 음악 페스티벌인 '스칸자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눈 앞에 보이던 풍력발전기를 밴드의 이름으로 하고, 투어를 계획하는 그들.


바실 리타가 해안선을 기점으로 스칸자노까지, 차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곳을 그들은 10일간 횡단하며 가기로 결심한다. 여정에는 여러 원칙이 세워진다. 두 발로만 걸어갈 것, 공연과 여정에 필요한 짐은 당나귀와 수레가, 비상시를 제외하면 핸드폰은 사용이 안되고 음식도 식당에서의 매식은 금물. 왜 이런 바보 같은 여행을 시작하는지 궁금해질 때쯤, 영화는 아주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삶은 너무 짧은 여행이다. 그러니 길게 만들자!


그렇게 삶이란 짧은 여행을 길게 만들기 위해 (?) 두 시간의 여정을 열흘로 만든 이들은 바로 그 여정의 한가운데서 노래를 들려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삶의 어떤 의미들을 짚어내게 된다. 가장 공명을 울렸던 건 결혼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밴드의 여정에 함께할 결심을 하는 마리아의 대사이다.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노인네들 얘길 듣게 돼요. 보통 날씨 얘기나 젊은 시절 얘기죠.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니까요. 날씨 얘기할 때완 달리 젊은 시절 얘기할 땐 눈이 반짝여요. 나도 늙으면 손자에게 옛날 얘기를 해주겠죠. 바실리카타를 횡단하던 남자들 얘기 같은 거요.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요.”


서로에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내어준  마리아와 밴드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난다. 밴드는 스칸자노를 향한 자신들의 길을 계속 가고, 도망치듯 떠나왔던 마리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남은 삶을 살아간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안타까움의 마음을 조용히 간직한 .


우리 모두 때때로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나에겐 그 친구가 그랬다. 하지만 세상에 수만 가지의 길이 있고 우리는 가야 하는 곳이 달라  이상은 함께   없다는  알게 됐다. 그래서, 다음 교차로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떠나도 충분히 삶은 살아질 수 있다는 걸 마음 아프게 배웠다. 그렇게 그 친구를 '시절 인연'으로 명명하고 떠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가닿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우리들.




우리는 모두 여행자다. 그것도 삶이라는, 너무 짧은 여행을 하는 중이다. 이 여행을 길게 만드는 건 각자의 선택이다.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이 여행에는 예기치 않은 고통과 기대하지 않은 외로움이 있을 거다. 아주 잠깐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무색하게 상당수는 그저 그런 날들일 테고, 이 여행이 길어질수록 의미 없이 힘들기만 한 날들은 아마도 계속되겠지. 그런 어느 날 아침, 머릿속에는 어떤 한 질문이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렇다면, 내 답은 "삶이라는 짧은 여행을 길게 만드는 중." 우리는 각자의 여로를 걷다 우연히 교차로에서 만났다. 손을 맞잡고 여정을 함께 하기로 다짐한다. 이왕이면 길게 길게, 그래서 조금이라도 반짝이는 순간을 더 자주 나누자고. 대신 그저 그런 날의 답답함까지도 모두 여정의 한 부분임을 받아들이고 함께 맞잡고 걸어 나가자고.


(2018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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