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우울할까?
나의 스물아홉도 여지없이 검은 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우울감에 대해 ‘검은 개’라는 별칭을 붙였고, 이것은 오늘날 우울감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의 밝고 강인한 성격 뒤에는 항상 우울감이 자리했다. 사실 나와 검은 개와의 관계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내가 열여덟, 열아홉 즈음에 차에 몸을 던져볼까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열여덟, 열아홉 살이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평범하고 또 평범했고 가정에서도 사랑받으며 살아온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10대에는 기억 속에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우울감을 겪게 했었을 것이다. 보통 기억은 시간에 따라 미화된다고 하는데 미화된 기억이라도 한 점 남아있지 않은 것이 슬프다.
사실 한국의 10대들에게 행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하다. 모두가 같은 ‘입시’라는 하나의 무의미한 목표만을 쫓다 보니 행복의 기반이 되는 자아의식이 잠식된다.
나의 경우에도 ‘성공하고 싶은 나’와 ‘행복하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성공과 행복을 하나의 개념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입시에 실패하고 난 이후에 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는 좌절감에 빠져버렸다. 그때는 왜 이렇게 현명치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다른 학교에 진학해서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현명하지 못하게 흘려보냈던 5년 남짓한 시간들이 후회된다.
그 5년 동안을 허투루 보낸 이후에는 다시 취업이라는 큰 고난이 생겨버려 또다시 내가 누구인지 되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물론 한국 회사들이 좋아하는 ‘자기소개서’라는 것을 작성하고 나면 내가 아닐지도 모르는 허구의 누군가를 돌아볼 시간이 생기지만 말이다. 분명히 나를 되돌아보았는데 자기소개서를 읽다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일도 많을 만큼 과장한 면도 있다.
사회에 나온 지 5년 차가 된 지금, 다른 어떤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는 당혹스럽게도 진짜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버린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10년 동안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시기에 큰 혼란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지금 와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나의 1순위는 무엇인지, 친구들은 다 결혼을 한다는데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은 건지, 내가 읽고 싶은 작가는 누구인지, 항상 하고 싶었던 일은 있는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하나도 할 수가 없어져 버린 순간이 가장 절망적이고 우울했다.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던 삶의 종말이 와버렸다. 이 종말은 너무나 비참하고 나의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를 의심케 하면서 모든 자아를 무너뜨린다.
스물아홉, 나의 검은 개는 또다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