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세계로부터

by 김한슬



어린 시절 나는 조용히 책을 읽는 법을 몰랐다. 따사로운 햇볕이 방 한가운데 동그랗게 떨어지면 그 위에 엎드려 동화책을 펼쳐 들었다. 종이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던 냄새와 따뜻한 햇볕이 섞인 공기는 마치 비밀스러운 나만의 극장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책을 읽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읽기라는 말은 내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 문장을 따라가는 동시에 문장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주인공이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릴 때면 내 발도 들썩였다. 무언가 먹는 장면이 나오면 군침을 삼키기도 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가 만들어 낸 세계는 더 크게 확장되었고 그 세계 속 등장인물들은 내 옆에서 함께 살아가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얘는 책을 읽는 거야. 떠드는 거야? 언니 나 진짜 질렸어요.”

가끔 만나는 고모는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을 듣고 지친 내색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어 보이는 엄마를 보면서 그 순간이 민망하다가도 속으로는 또 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책을 읽을 때만 세계가 열리는 건 아니었다. 책을 덮고 나면 그 상상력이 생활 전체를 덮어버렸다. 베개는 구름이 되기도 했고 굴러다니는 양말은 꼬마 요정으로 변신했다. 이불은 모험가들이 지나가는 성이나 초록한 언덕이 되었으며 내 손에 쥔 기다란 볼펜은 마법 지팡이가 되었다. 그 상상력은 계속해서 커졌고 결국은 내 주변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특히 사촌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우리 집 거실은 단번에 나만의 극장으로 변했다. 작은 테이블 하나를 펼쳐 커다란 스케치북을 올려놓은 나는 직접 쓴 대본 비슷한 것을 들고 연출자인 척 연기했다.

“너는 공주, 너는 괴물, 너는 마법사인데 절대로 착해져선 안돼.”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설정이었고 대사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우리는 인형에게도 역할을 주며 배치하고 이불로 아지트를 만들어 무대로 이용했다. 그리고 모두가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박수를 치며 끝내는 우리만의 연극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 순간 나는 감독이자 작가이자 배우가 되어 공간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글을 적고 싶어 하는 이유가 단순히 적는 즐거움이 아니라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힘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때가.

여러 글짓기 대회는 그 힘을 가장 확실하게 느꼈던 자리였다. 선생님들은 내 글을 흥미롭게 읽어주었고 상장은 어느새 뒤집어엎으면 와르르 쏟아질 만큼 박스를 한가득 채웠다. 그 상장들이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인정했다는 증거 같았다. 자연스럽게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라는 자신감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선생님은 부모님에게 논술을 추천했다. 그때의 나는 그 추천을 칭찬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순진한 기대를 품고 논술 수업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논술의 세계는 정확하고 단정하고 논리적인 글을 요구했다. 서론은 이렇게 시작하고 본론은 이렇게 나눠서 쓰고 결론은 이렇게 정리해야 한다는 비밀 규칙이 있었다. 문장 하나도 마음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틀 안에서 글을 쓰려면 깊은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것처럼 답답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보다 틀에 맞는 문장을 우선해야 했다. 상상은 조용히 숨었고 깔끔한 문단과 적당한 논리를 억지로 조립하며 내 마음은 곪아갔다. 어쩌다 보니 글쓰기 시간에 책상에 앉으면 이전처럼 설레지 않았다. 정형화된 틀에 갇혀 걱정이 먼저 떠오르고 있었다. 내 글은 어느새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진 정답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글을 서서히 멀리했다. 글이 아니라 글을 억누르는 틀을 멀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땐 몰랐다. 그저 내가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만 뼈아프게 깨달았다.

하지만 책을 놓지는 않았다. 남이 만든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여전히 자유로웠고 부담이 없었다. 책 속에서 나는 여전히 모험가였고 마법사였고 숲을 헤매는 주인공이었다. 누구도 내 문장을 평가하지 않았고 틀에 맞추라는 지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글보다 책을 가까이했다.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 읽는 사람으로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러다 아주 조용한 순간에 욕심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책을 읽던 중이었는데 문장 하나를 읽고 마음속에서 이상한 투덜거림이 들렸다. 처음에는 사소한 끄트머리 같은 생각이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것은 커다란 갈증이 되었다. 어릴 때의 나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가던 아이였는데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야 말았다. 그 뒤로 조심스럽게 다시 글 앞에 섰다. 처음엔 문장이 어색했고 손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문장을 쓰기 시작하자 오래 잠들어 있던 상상력이 슬며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릴 때만큼 정신없고 소란스러운 세계는 아니었지만 또렷하게 나를 반겨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틀 없이 점수 없이 기준 없이 그저 내가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것을 글로 옮길 수 있다는 것. 나의 세계가 너무 오래 그리웠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다시 시작한다. 모두를 움직이던 그 의기양양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조금은 엉뚱하지만 확실히 나다운 세계를 다시 펼쳐 보려고 한다.​그리고 이번에는 누구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시끄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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