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이별하기
늦은 시간의 그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장실 입구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날따라 늦어 버린 퇴근으로 인해 지쳐서 그에게 방에 들어가 자라고 다그쳤다.
깊은 잠에 든 듯 무응답이다
피곤한 일과를 씻으려면 화장실로 들어가야 했기에 입구 쪽 그를 흔들어 깨웠다.
짜증이 살짝 났다. ‘침대에 가서 잘 것이지~’
순간 화장실 입구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발은 밖으로 다른 한 발은 욕실 쪽으로 벽에 기대어 걸터앉아 있는 그는 깊은 잠에 든 표정이다.
욕실 쪽으로 뻗은 오른손에는 걸레가 쥐어져 있었다.
평소 치질로 가끔씩 혈변을 보던 그이기에 변기 속이나 바닥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의외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바닥에 앉아 그 몇 방울의 혈흔을 지우려고 걸레를 든 것 같고 그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거나
순간 잠이 들었는지 손을 뻗은 채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여러 번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이렇게 깊이 잠에 들 수 있나?'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의 숨을 살폈다. ‘모르겠다. 안 쉬는 것 같은데,, 아니겠지,, 설마,, 설마'
아프도록 그를 흔들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용하다. 손을 잡았지만 반응이 없다. 눈을 뜨게 하려 했지만 초점도 없이 감긴다.
안돼~ 악소리와 함께 눈물이 터졌다. 119에 전화를 했다.
119의 응답 멘트대로 내가 그에게 심폐소생술을 한 것을 기억한다.
배우기도 했고 생활에 필요할 것 같아 실습도 해봤기에 내가 한 소생술은 제대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손을 거부하는 듯 반응이 없다.
경찰도 오고 응급차도 왔지만 나는 미친 듯이 울었던 기억이다.
가족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아빠가.. 자는데.. 이상해... 119 “
”욕실에서 “ ”혈변을 “ 병원으로”
딸아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말투가 울부짖는 듯 울려 “뭐라고? 하며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119 선생님이 아산지역의 응급실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천안의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래도 '119가 왔으니 이제 살겠구나' 하는 안심이 들면서도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불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정말 사람이 미치면 이렇게도 몰골의 악을 쓰는구나 싶었다.
응급실에서는 수차례의 심폐술을 진행하고도 돌아올 기미가 없는 그를 붙잡고 있는 내 울음이
진정되기를 원했나 보다. 이제는 포기하라는 것일 것이다.
‘이제는 그만 인정해’ 하는 듯이 ”환자분은 이제 더는... “
다른 응급실에 계신 분들이 불안해하니 지하의 장례식으로 가라고 했다.
난 입을 틀어막고 울먹이며 부탁을 했다..
“안 울게요, 아들이 곧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더는 울지 않을게요”
병원 응급실에서는 그런 나를 차마 막지를 못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을 훔칠 여유도 없었다,
‘제발 안 울 테니까, 제발 제발 ’
그의 얼굴을 계속 만져도 말로만 듣던 차가움이 없어 그는 금방 깨어날 것만 같았다.
진짜인 거야.? 정말이야? 당신 정말 간 거야? 그를 보며 물었다.
숨죽인 울음은 대답도 없을 질문에서 사과로 변하였다. 그 또한 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사각이 쳐진 침대 위에 단 둘이 있게 된 나는 그를 어루만지며 ‘미안해’만 반복했다.
아들이 왔다.
늘 은연하고 착하기만 했던 아들은 신기하게 슬픔을 모르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엄마인 나를 부축하며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당신 아들이 왔어, 이제 당신 딸이 올 거야, 보고 가”
그런 말을 한 것도 같지만 사실 거짓이다. ‘왜 나에게 이래? 왜 우리에게 이래’
이제는 보내야 하는 미안함 보다 가버린 그에 대한 원망이 밀려왔다.
우리 아들은 욕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욕을 할 줄 모른다. 아니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날 장례식에 내가 한 말이라고는 욕밖에 없었던 거 같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지금? 어떻게??’
그때를 회상하던 조카가 내가 슬픔에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미친 듯이 욕만 해댔다고,,,
미안하다는 말은 그뿐이었고, 내내 나는 원망에 섞인 욕을 했다.
온통 화가 난 욕뿐
세상에 저런 미친놈이 있을까, 저렇게 갈 수가 있을까
장례식 날, 그날 그가 가서 그의 장례식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겐 아빠를 잃은 날인데 ,, 미안한 마음이다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을때도 딸아이가 대신하여 내 핸드폰에서 익숙한 이름의 몇 사람만 겨우 연락을 했다. 모든 것을 대신하여 가족들이 해 주었다.
난 말도 하기 싫었다. 입도 떼기 싫었다.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았다.
장례식 내내 밥도 먹질 못했다. 겨우 달래서 물 한 모금했지만 눈물이 났다.
밥 한술 뜨라는 언니에게도 “며칠 밥 안 먹는다고 안 죽어~ 제발 나보고 밥 먹으라고 하지 말아 줘 ㅠ”
신기하게 배고프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린다거나, 기운을 차린다는 건 사실 잠시 그 상황에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무슨 상황인 줄은 알겠는데 지금 이게 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슬픔이라는 것과 막막함 같은 것도 미쳐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정의 순서에 밀려 그냥 잠시 먼저 지나가도록 비켜섰다가 뒤통수에 커다랗게 '훅' 치고 들어오는 감정들이었다.
장례식을 기억하려 한다는 것은
사랑했던, 오랜 시간 알고 있던, 가장 긴 시간을 함께 살았던 기억과 기억, 그리고 기억들은
접었다 폈다. 찢었다, 붙였다 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한토막의 글을 썼다가 다시 오열하고, 그때를 떠 올렸다가 며칠을 슬퍼해야 하는 과정이다.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그날이 내가 40년을 알고 지냈던 그가 그렇게 간 날이라고 했다.
33년을 보며 살다가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헤어짐의 준비도 없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심정지가 온 그와 그렇게 이별을 해야 한다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그날이 그의 장례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