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최선을 다해 최악을 피하는 일?
신지예가 갔다
인생은 최선을 다해 최선을 고르는 일이라기보다,
최선을 다해 최악을 피하는 일에 가깝다 싶을 때가 많다.
세상사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하나를 고르는 일보다, 하기 싫고 맞닥뜨리기 싫은 일 중에 최악을 피해 차악을 고르는 일이 훨씬 많지 않은가 말이다.
개중에 하나를 꼽자면 직장 상사가 있을테다. 희망 부서를 적는 소원수리 기간, 내가 좋아하는 직장 상사를 찾아 그 부서를 쓰는 게 아니라 보통은 폭탄 피하기다. 그 많은 폭탄들 중 '덜' 폭탄이거나 혹은 내가 그 부서에 있을 기간 동안만이라도 안 터질 폭탄을 찾는데 혈안이 된다. 그리고 이같은 선택 경로가 인생에 훨씬 흔하지 않냐고, 나는 감히 외쳐본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그러한 최악 피하기에 능한 인간이 못 된다. 싫은 놈과 나쁜 놈은 한데 묶어 '최악'이지 그 중에 옥석을 가리기가 싫다. 정확히는 그 옥석을 가리는 데 드는 내 공력이 아깝다. 똥은 다같이 똥인 것을 된똥이나 설사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주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이성적으로' 옥석이 아닌 똥 가리기에... 열심인 사람의 인생이 현명하다는 생각은 종종, 아니 자주 든다. 개인의 인생으로 봐서는 본인에게 유리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찾는 자세가, 쌓이고 쌓여 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똥이 된똥인지 설사인지를 알면 미리 대비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나처럼 걸핏 하면 '똥판을 걷어치워라!' 하는 사람은, 기세만 등등하지 지구력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똥을 피하지 못해 즐겨야만 햐는 상황에 봉착해선, 그에 대한 대비도 훨씬 미비할 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람 중에서도 나는 제3지대에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예 새 판을 만들겠다고 걷어부치는 사람한테 힘을 실어주고픈 맘이다. 그런 맘으로 지지했던, 새 판을 만들어보겠노라 나섰던 정치인이 페미니즘 의식에 있어 최악과 차악 사이로 보이는 거대 양당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던 그가 차별금지법을 놓고 "국민의힘은 적어도 말 바꾼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니 마음이 요상하다. 사실 요상하다는 말은 너무 사소한 말이고, 마음이 저린 수준이다. 수많은 안티페미니즘적 언사를 해왔던 양당 사이, 말이라도 덜 바꾼 곳이 그에겐 국힘이었을까. 그의 최선은 국힘이었을까. 나의 최선에 가까웠던 정치인의 '최선'이 나와 다름을 안 순간은 헛헛 그 자체다.
크고 작은 일상의 선택 속에서, '적어도'의 세계를 얼마나 거닐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항상 '그래도'를 말하는 사람이고팠는데.
엉뜨 기능이 탑재된 듯한 퇴근길 1호선. 퇴근길 개똥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