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슬기 Jun 05. 2023

'WBC 술판'을 보는 어느 여성팬의 단상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4

일찌감치 지난 2일 경기(NC vs LG의 잠실 경기)를 예매해놓고 아무도 시키지 않은, 나름으로의 맘 고생이 많았다. 직전에 'WBC 술판 파문'이 일어났는데, 내가 직전에 쓴 글에서 마산까지 가서 유니폼을 샀노라고 천명했던 바로 그 선수가 술판 3인방 중 한 명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로선 SSG 김광현만이 1군에서 말소됐을 뿐, 두산 정철원과 함께 그 선수는 1군 엔트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문제적 처사라고 생각했고, 경기장에 갔다가 혹여나 그 선수가 등판하게 되면 그 모습을 어찌 볼까 싶어서 섣불리 발걸음이 안 떼어졌다. (설마 이 상황에 나오진 않으리라고 여겨지긴 했지만) 관련 유튜브 영상들에 보면 '이 판국에도 KBO를 소비하는 팬들 때문에 야구판이 반성없이 잘도 돌아간다'는 식의 댓글들이 있어서 마음이 쓰리기도 했고.


술판 파문에 대해서는 KBO에서 조사 중이고, 자세한 건 결과를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라도 쓰고 싶은 말이 있어 쓴다. 정확히는 내 마음의 매듭이라도 풀고 싶기 때문에 쓴다. 이제 갓 입문한 야구팬, 그것도 여성팬으로서 이 난리통을 들여다보는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관련 여론 가운데 "선수들이 국가대표의 무게를 모른다"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국민 세금으로 꾸려지는 국가대표라 함은, 우리가 출장 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술 한 잔 마시러도 가는, 그런 개념하곤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 컨디션이 중요한 운동선수라 하면 더욱 더 그렇다. 선수들을 단속하지 못한 KBO에 책임을 묻는 여론도 간혹 있던데, 그것엔 공감이 안 간다.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라서 본인이 두산에서 주장을 할 때도 그런 걸로 선수들 단속은 안했다는 전 야구선수 안경현의 말처럼 '다 큰 성인'을 어떻게 컨트롤 할 것인가.


내 보기에 대중의 분노는 그 주장보다는 "나만 진심이었어?"라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너는 경기 없는 날이면 술쯤은 예사로 마시는 수준이었구나?"(선수들 해명처럼 경기 직전이 아닌 경기 직후나, 휴식일 전날 마셨음을 감안해도) 같은 것 말이다. 당사자보다도 앞선 흥분이었다는 사실, 국민 세금으로 꾸려지는 국가대표가 사실은 국민들보다 '찐텐'이 아니었다는 현실 등이 일종의 '농락당했다'는 기분을 만들었다. 가뜩이나 "야구는 레저"라는 타 종목 팬들의 비아냥에 야구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종목인지를 설파하느라 목에 핏대가 잔뜩 올라가는 야구팬 입장에서는 더욱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한국 야구에 대해 좀더 비판적인 관점을 가진 팬이라면 "이것들 국가대표에 진심이 아닌 거 알고는 있었는데 정말이었네?"가 될 것이다. 그런 추측들을 술판으로 확인 사살한 셈이기에, 그들 주장은 더욱 작두를 탄다.


이쯤해서 여성팬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 일련의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 '여자 끼고 희희낙락' 같은 글들을 발견할 때다. 누군가는 '결국은 시점이 문제이고, 유부남도 아닌 성인 남성이 그런 곳을 찾는데에야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 자체로 문제다. '그런 곳'이 최초 폭로한 유튜브 채널에서 말하는 '룸살롱'이든, 선수들이 말하는 '스낵바'든, 여성 접객원이 테이블을 오가며 '술 시중'을 드는 술집임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가 압도적인 성 산업의 패러다임 속, 그걸 그대로 답습하는 술집에(펍이나 이자카야도 아닌 스낵바에) 내가 응원하는 선수들이 갔다는 사실 자체가 맥이 빠진다. 마치, 회사 다니던 시절 회식 자리가 N차로 무르익으면 '토킹바' 같은 곳엘 여성 후배들도 함께 데려갔던 남성 상사를 목도하는 것처럼.


가뜩이나 야구는 여성에게 가장 장벽이 높은 스포츠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90년대, 200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 여자는 접할 수 없는 스포츠였고 지금까지도 한국에 여자 프로야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직 남성들이 하는 프로야구를 응원할 수 밖에 없는 내 상황이, 가끔 답답해올 때가 있다. 그런데다 이런 사건까지 더해지면 더욱 '현타'가 온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경기를 보러 잠실에 갔다. 온갖 잡념에도 불구하고 야구가 보고 싶고, 야구장이 가고 싶어서 '흐린 눈'을 하고 집을 나선 길이었다. 야구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용찬이 1군에서 말소됐다는 기사를 봤다. 내가 좋아하는 팀이 그나마도 상식을 지키는 팀이라는 점에서 크게 안도했다.


문제는 앞으로의 상식이다. KBO가 얼마나 엄정한 조사를 하는지, 그걸 바탕으로 야구팬들이 납득 가능한 처분을 내리는지, 소속 팀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등등.  매번 내 윤리 감각을 시험대에 올려야만 하는 야구팬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이런 고민과 근심없이 야구를 보고 싶다. 마냥 좋아하고, 마냥 응원하면서. 야구를 좋아하는 선량한 마음을 '길티 플레저'로 만들지 않기를, 이른바 '야구판'에 간곡히 청한다.

내 신상 유니폼 어쩔...



매거진의 이전글 야구, 참 어렵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