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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Jul 30. 2023

야구장 앞에서 전 직장 상사의 전화를 받다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12: 고척행

2023년 5월 12일 금요일


사흘 내 잠실을 두 번 갔더니, 어느 정도 '혼직관'에 자신이 붙었다. 사실 자신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영화관에서 영화 보듯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따로 또 같이 경기를 본다. 응원도 하고, 간간이 먹을 것도 먹는다. 거기다 야구장 곳곳의 혼자 온 여성들(그들은 주로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을 보다 보면 더욱 의지가 됐다. 야구장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이자 각자다.


어느 순간 야구장의 그리디(greedy)한 먹거리들이 물려서, 다이어트 중인 나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갔다. 삶은 달걀 두 개와 방울 토마토 10알에 텀블러에 집에서 만든 아이스 카페라떼를 챙기는 식이다. 사실 야구를 보다 보면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터져 나와서 먹는 데 집중이 잘 안됐다. 치킨이나 햄버거 따위를 왕창 사도, 손이 잘 안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응원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음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앞뒤 양옆으로 보면 먹으면서도 잘만 응원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나는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달걀 두 개와 방토 10알은 경기 시작 30분 전 쯤 선수들이 몸 푸는 걸 보며 느긋하게 먹기 좋은 양이고, 아이스 라떼는 경기 중간 중간 목을 축이는 정도로 활용하면 딱이다. 야구 앞에서, 나는 종종 식욕을 잃는다. 승부욕이 식욕을 뒤덮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제 잠실은 정복했다는 자신감에 다른 곳으로 진출하고 싶어졌다. 만만하게는 가까운 고척이 있었다. <최강야구> 직관을 혼자 가려다 그만 취소했던 그 곳. 내가 직관 쪼렙이었을 때 감히 엄두가 안 났던 그 곳. 그러나 나에겐 이제 두 번의 경험치가 쌓였고, 당연히 고척이라고 못 갈 것은 없었다. 5월 12일, 키움과 NC 경기의 표를 끊었다.


어느 화창한 금요일이었던 그 날, 일찍 짐을 챙겨 고척으로 갔다. 도착하니 오후 3시 30분이었고, 경기 시작 시간인 6시 30분까지는 3시간 가량 남아 있었다.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 책을 읽기로 했다. 원래 책이란 카페에서 읽으면 더 잘 읽히려니 하는 거니까. (막상 가면 더 못 읽는 것이기도 하다.) 가져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직전 회사에서 부장으로 모시던 분이었다.


"네, 부장. 안녕하세요."

"어, 슬기야. 잘 있었어?"


지난해 12월, 회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간간이 연락을 해오시는 부장이었다. 회사를 그만 둘 때, 인생 선배로서 끝내 만류했던 분이시기도 하다. 내게는 여러 고마움으로 남은 분이었다. 부장과 안부 겸 이 얘기 저 얘기를 주워 섬겼다. 여러 문답 끝에 부장이 말씀하셨다.


"지금 어디야?"


나는 그 짧은 찰나, 순간 어디라 해야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부장과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사촌이었기에, '집'이라는 말은 금방 거짓임이 들통날 가능성이 컸다. 바른대로 답할 수도 있으련만, 고척은 '돔'이라는 도식이 절대적인 곳이었고 남들은 다 일하는 금요일 한낮부터 고척에 전진 이동해 있는 백수의 한가로움이 조금은 한심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약간은 우물거렸던 거 같다.


"저요? 고.. 고척이요."

"야구 보러 간 거야?"


부장은 내가 얼마나 야구를 좋아하는지 익히 알고 계셨기에, 단박에 이유를 알아 맞추셨다. 나는 "네네. 백수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하며 오랜만에 사회생활 모드로 느물거렸다. 어디 팬이냐는 말에 NC 팬임을, 커밍아웃하고 야구에 조예가 깊은 부장과 한창 NC 얘기를 조잘거렸다. 부장은 집이면 근처에서 저녁이나 한 끼 하자고 할랬다며, 다음을 기약하시곤 전화를 끊으셨다.


부장과의 전화를 끊고 나니, 회사를 다니던 때의 금요일 생각이 났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는 금요일에는 마감할 지면이 없는 대신(토요일자 신문이 없었다) 온라인 기사를 거푸 쓰고, 일요일 출근에 대비해 아이템을 찾아 다녀야 했다. 간혹 회사로 출근할 때도, 아님 출입처 기자실로 갈 때도 있었다. 이 시간 쯤이면 퇴근이 얼마 안 남아 설레면서도, 기사 할당량을 못 채워서 조바심을 내거나 일요일 아이템 준비로 분주할 때다. 그리곤 퇴근해, 용광로 같은 머리를 식히러 맥주 한 잔을 하러 가겠지. 그 삶도 결코 불행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일과 삶이 분리가 안 되며 의미가 없으면 아무리 돈 주는 일이라도 하지 않으려고 들던 나같은 인간에게는, 여러 곡절 끝 내가 손수 만든 커리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쉼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후회는 없다.


쉼에 대해 생각하다가, 2년 전 유일한 FA 미계약자였던 NC 투수 이용찬에까지 생각이 튀었다. 2020년 6월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던 그는 재활 과정 중에 FA를 선언했고, 그 바람에 원 소속팀인 두산과의 협상이 원활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큰 수술을 받아, 얼마나 제 기량을 회복할 지 알 수 없는 선수를 두고 배팅을 하기가 소속팀 입장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왜 아픈 몸을 이끌고 FA를 선언했느냐는 물음에, 이용찬은 이같이 답한다.


“원래는 FA 신청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술하고 재활하면서 단 한 번도 브레이크가 걸린 적이 없었다. 수술 전까지만 해도 항상 통증을 달고 살았던 내가 수술 이후 통증 없이 공을 던질 수 있는 게 신기했다. 몸 상태가 좋아지는 걸 느끼면서 자신감이 생기더라. 앞으로 건강한 몸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FA를 통해 내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이영미, 일요신문, '유일한 FA 미계약자 이용찬 “건강하다…좋은 공 던질 자신 있다”', 2021. 5. 8)


이용찬은 결국 2022년 5월까지 유일한 FA 미계약자로 남아 독립구단 등에서 피칭을 이어가다가, NC와 3+1년, 최대 27억원에 계약을 한다. 이른바 '혜자(가성비) 계약'이라는 평이 많았고, 그 해 화려하게 부활한 이용찬은 "1년만 더 참고 그 다음해 계약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의 답은 이렇다.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좋은 팀에 가서 이렇게 잘 복귀할 수 있었다."(박소영, 일간스포츠, '팔꿈치 수술 딛고 부활 NC 이용찬 "3패 기록 가장 후회"', 2021. 11. 25) 결국 순간에 최선을 다 하고, 결과는 기다리는 것이 자기 몫의 삶 아니겠냐는 평범하면서도 자주 잊는 진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여러 상념을 안고, 경기 시작 1시간 전 고척돔에 입성했다. 입구에서 여러 버건디 유니폼 무리들을 만났는데 '이정후'와 '안우진' 마킹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2030' 여성팬들이 다수였다. LG와 두산 같이 역사가 긴 서울의 다른 구단들보다도 키움은 젊은 팬들의 비율이 높아보였다.



처음 찾는 돔구장은 솔직히 갑갑했다. 야구장의 제1 장점은 탁 트인 개방감, 이라고 생각하는데 뚜껑이 닫힌 돔구장은 숨이 컥컥 막혔다. 마스크는 안 써도 되지만, 코로나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는 시기라 혹시나 몰라 챙겨온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실제 돔구장이라 그런지, 잠실 때와는 달리 마스크를 쓴 관중도 여럿 보였다. 바깥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아 '우취 없는 야구장'이란 점은 좋겠으나, 인생은 역시나 변동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더욱 풍요로워 지는 것이라고, 갑갑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공황 경험자'는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키움의 베테랑 포수 이지영은 '스톡킹'에서 돔구장이 '우취' 없는 것 빼고는 다 좋다고 얘기한 바 있어, 선수들 입장에서는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뜨거운 여름이 없는 구장이라니, 얼마나 좋을 것인가.)


신기한 것은 구장 곳곳 어딜 카메라로 갖다대도, 소싯적 일본 프로야구(NPB) 중계를 보는 듯한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거였다. '바람의 아들'(a.k.a. 정후의 아빠)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날아다니던 시절, 밤 9시 스포츠 뉴스로 그의 활약상을 더러 챙겨봤었다. 그 때 화면으로 봤던 일본 돔구장의 공기가, 내 폰으로 찍은 고척돔 내부 사진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는 것이다. 자연광이 아니라 그런지 살짝 바랜 듯한 탁한 채도가, 오래 전에 찍은 필름 카메라 사진 같았다. 내가 '바람의 아들' 경기를 보러 온 건지, 손자 경기를 보러 온 건지 순간 헷갈렸다.


내가 앉은 3루 다크버건디석은 생각보다 시야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앞에서 1~3열까지는 저 철창 같은 펜스 때문에 더욱 답답했다...


이날 키움 선발 투수는 안우진, NC는 이용준이었다. 안우진은 7과 1/3이닝을 소화하면서도 줄곧 시속 150km를 넘는 구속이 죽지 않아, 가히 리그 최고 내국인 선수라는 타이틀에 걸맞았다. 구위보다는 컨트롤로 승부하는, 배짱 좋은 투구를 하는 이용준이 이날은 5와 2/3이닝 동안 8피안타 2실점을 하며 안우진보다 일찍 무너졌다. 절대적으로 보면 나쁜 기록은 아니나, 상대 선발에는 못 미치는 수치였다. 마운드에서 물러나는 이용준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보냈다. '절대'의 기록이 쌓이면,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일도 곧일 테니 말이다.


이날 처음 본 '바람의 손자'의 위세도 대단했다. 올 시즌 들어서는 타격왕을 노리던 예년만 못한 성적을 내고 있지만, 그가 타석에 들어설 때의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멋쟁이 신사' 리듬에 맞춰 타석에 들어선 그가 투수를 향해 배트를 한 번 쭉 뻗었다가 거둬들이는 루틴을 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꼼꼼히 바라봤다. 이치로가 롤모델이라더니, 가히 이치로 같은 실루엣이었다. 1회 선두 타자로 나온 그는, '리드 오프'라는 직분에 걸맞게 안타로 출루했다. 바람의 손자로 시작해서 좌익수 박찬혁, 발 빠른 김혜성으로 이어지는 키움의 클린업 트리오가 출루하고 나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특히 이정후와 김혜성은 '상대를 괴롭히는 타자 혹은 주자라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를 몸소 체감케 하는 듀오였다.


NC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서, 이날 경기는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소위 말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다. 시원스런 장타보다도, 볼넷(박세혁) - 희생번트(오영수, 김주원) - 희생플라이(도태훈)처럼 철저한 팀배팅으로 차곡차곡 테크트리를 밟는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정말로 어렵사리 품들여 얻은 2-2 동점을 만드는 귀한 1점이었다. 그러나 같은 7회, 키움 공격 이닝 때 안타로 출루했던 김혜성이 러셀의 좌전 적시타에 혜성 같은 속도로 '홈인', 3-2 리드를 지켰다. 1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오기는 역부족인 타구로 보였지만, '저게 돼?' 싶은 걸 가능케 하는 김혜성의 발이었다. 김혜성만 보면 PTSD가 올 것 같았다.


8회 NC가 권희동의 안타로 동점까지 따라붙고, 9회 1사 1, 2루에서 손아섭의 적시타로 4-3 역전까지 일궈냈다. 아, 이제 한 이닝만 막으면 된다. 설마, 그 새 별 일이 일어날까. 마운드엔 클로저 이용찬 대신 김시훈이 올랐다. 어제 KT전에도 올랐던 이용찬의 연투 대신, 이용찬 부재 시 임시 클로저 역할을 맡는 김시훈을 선택한 것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거리는 유난히 넓은 그의 어깨가, 멀리 3루 내야석에서도 보였다. 클로저의 무게란, 저런 것인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는 오랜 격언이 떠오르는 차, 1사 1, 2루의 상황에서 키움의 타자 임지열이 스리런포를 터뜨렸다. 7-4. 키움의 대역전극이었다.


그날 나는 끝내기 홈런을 맞자마자, 선수들의 인사도 보지 않고 황급히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망히, 잽싸게 발걸음을 옮겨 구일역 쪽으로 향했다. 볼넷 - 번트 - 희생플라이 등으로 그렇게 어렵게 쌓아올린 한 점 한 점이 홈런 한 방에 와르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는 게 지나치게 뼈아팠다. 별안간 맞은 홈런 한 방에 홧홧하게 쓰린 상처를 가눌 길 없는데, 고개를 푹 숙인 선수들 얼굴을 볼 일이 감당이 안 됐다. 그러고 보면, 경기에 진 건 선수들인데 별 관계도 없는 내가 이렇게까지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이 원인 모를 상처를 꽁꽁 싸맨 채, 지하철로 한 시간 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경기 전 화이팅은 결연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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