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슬기 Aug 13. 2023

'야구선수 얼빠'면 뭐 어때서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13: 3주 만에 또 부산행


2023년 8월 3일(목)


3주만에 또 부산행이었다. 전에는 KBO 올스타전을 보러 갔고, 이번엔 NC와 롯데의 경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정확히는 롯데 자이언츠와 경기하는 NC 다이노스를 보러 가는 것이었지만.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내 손엔 <환상통>이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4년쯤 전인가, 친애하던 문학평론가이자 편집자인 분께 추천 받은 소설이었다. "기자님, 아이돌 좋아해본 적 있으세요? 그럼 공감이 잘 되실텐데 …" '아니오'라는 답과 함께 사실 나는 속으로 '앞으로도 볼 일이 없는 책이겠군' 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친구들이 god와 신화 팬으로 양분돼 있던 10대 때도, 누구 하나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 일방향적인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커서 연애 전선에 뛰어들고 나서도 나는 짝사랑은 웬만해선 하지 않았다. '헛심 쓰기 싫다'는 게 나의 일관된 기조였다.


아니 그런데 서른하고도 중반이 넘어, 야구를 알고, NC 다이노스라는 팀을 알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경기장에서 꼭꼭 그들을 마주하면서 생긴 이 일방향적인 감정은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출퇴근길과 그라운드에서 경기하는 모습, 덕아웃·불펜에서 노출되는 풍경,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에 올라오는 사진과 영상 등의 떡밥을 보며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넘어 사적인 모습까지 유추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이제 천군만마 같은 덕질 메이트 Y가 있었기에 더욱 덕질은 외연을 넓히게 됐다.  A선수의 갑작스런 2군행, 날아다니던 B선수의 타격 부진 등에 대해 우리는 지금껏 경기장 안팎에서 장작 쌓듯 모아온 정보들로 추정을 했다. 그것은 때론 실체에 가깝게 근접해서 우리의 덕력이 입증되기도 했다. 이렇게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면 뭘하나, 저쪽에서는 날 알지도 못하는데'라는 무력감이 깊어졌고 '역시나 엄한데 헛심 쓴다'는 자괴감이 엄습해왔다. 이런 감정을, 결혼한 또래의 여성 친구들은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투사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 비생산적인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 (이 감정이 얼마나 날 괴롭게 했냐면, 브런치에 선수나 팀에 대한 비판글을 쓰는 것조차 저어될 정도였다. 지난 10년 간 기자로 살면서 남을 까는 게(거칠게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직업이었는데, 나의 직업이 사랑하는 대상 앞에선 무용해지는 실로 놀라운 경험을 나는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해괴한 감정의 정체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을 무렵, 떠오른 책이 <환상통>이었다. 책의 뒷표지에는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라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책은 아이돌 N그룹의 멤버 M을 사랑하는 '나'와 '만옥'의 얘기다. 불과 2시간 전, 라디오를 끝내고 KBS 앞을 지나면서 만난 아이돌 팬으로 추정되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생각났다. 방송을 시작한 이래, 무시로 지나치던 풍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심상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같이 방송을 끝내고 나오던 평론가님께 "저거 4시간 뒤 제 모습이에요" 했다. 그가 말했다. "제가 (시민)단체 하면서 만난 분들 중에 H.O.T. 팬클럽하던 분들이 있는데요. 진짜 조직력, 실행력이 최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무수히도 많이 자문하고 있는 내 안의 헛심이 무용하지 않다는,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이리라는 인정을 받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환상통>은 구구절절 맞는 말들로만 씌어 있었다. 그냥 맞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팩트로 맞는 듯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빠순이'에게 남들은 평생 모를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이 가능한 것은,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과 관계성이 없다는데서 온다. 상호 호혜를 바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이지만, 더러 남들에 의해 쉽게 폄훼돼온 마음이기도 했다.


특히나 야구판에서는, 남성팬들에 의해 여성팬들의 팬심이 더욱 가열차게 훼손당한다. 남초인 야구 커뮤니티 등에서 여성팬들을 소위 '얼빠'로 지칭하거나 '유사 연애' 감정으로 선수들을 좋아한다며 수준 낮은 팬으로 폄하하는 문화가 있다. 야구팬 각자는 철저히 특정 팀이나 선수에 각자의 서사로 몰입한다. 근데 그게 왜 폄하의 소지가 되는지 모르겠다. 외모면 어떻고 실력이면 어떻고 연고면 또 어떻단 말이냐.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 때문에 남들에게 비난 받을 이윤 없다고, 부산역에 이르러 <환상통>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성별을 떠나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오직 외모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드물다. '외모'로 입덕했다가도 그의 실력, 그의 성장 과정, 프로 데뷔 후 서사, 팀 동료들간의 관계, 기타 등등이 섞여 총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선수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단초가 되는 입덕 포인트는 '투구폼'이지만(철저히 투수 선호형 인간이다) 그로부터 시작해 그가 만들어낸 여러 서사와 더불어 나의 덕력은 더욱 끈끈해진다.


폭염으로 인한 서행으로, 4시간 만에 도착한 부산역에는 웬 '이강인'들이 많았다. 'KANG IN'이라는 이름을 마킹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얼핏 봐도 10여명은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이날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이강인이 속한 파리 생제르망과 전북 현대의 쿠팡플레이 시리즈 3차전이 예정돼 있었다. 부산역 앞에서 내리쬐는 햇볕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셀카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친구가 단번에 전화가 왔다. 본인도 네이마르를 보러 부산에 왔다는 전언이었다. 아시아드주경기장과 사직야구장의 거리는 불과 도보로 30분 남짓. 우리는 지척에서 저마다 비슷한 듯 다른 아드레날린을 뿜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루틴하게 열리는 NC와 롯데의 경기보다는 그쪽의 주목도가 더 높았을 테지만, 오로지 NC에만 심장이 뛰는 나에게 파리 생제르망과 전북 현대의 경기는 세상에 없는 경기와 비슷했다. 사직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 즐비한 여러명의 이강인들을 보면서, '같은 마음 다른 방향'에 신기해했다.



사직야구장에는, 먼저 Y가 와 있었다. 우리는 야구장 안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조우했다. 사직야구장은 야구장 내에 있는 롯데리아와 엔제리너스가 팬들의 사랑방이다. 특히나 그 근처 1-4게이트로 선수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선수들의 출퇴근길 혹은 중외길(중간외출길)을 기다려 사인을 받기에 제격이기에 더욱 사람이 바글거린다. 선수들은 이미 출근한 상황이었고, 어인 일인지 분위기가 무거워서 손아섭, 이용찬 같은 베테랑 선수들은 더욱 걸음을 재촉해 경기장으로 들어갔다고 Y가 전해주었다. 경기 시작까지는 1시간쯤 남아 있었다. 그쯤이면 투수들의 중외길이 시작되기에 Y와 함께 짐을 챙겨 1-4 게이트로 향했다. 때맞춰 이용찬 선수가 예의 그 흰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게이트를 나서고 있었다. 넉살 좋게 "안녕하세요~" 했더니 그가 '꾸벅' 했다. 미리 준비한 KBO 공인구에 그의 사인을 받았다.


잠시 들른 롯데 팀스토어에서 만난 '기세'. 역시 롯데는 '기세의 팀'이다.


종이 티켓을 뽑고, 야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33도를 웃도는 폭염이라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날이었는데, 입구 곳곳에 화장품 미스트 마냥 고운 분사를 자랑하는 쿨링포그가 설치돼 있었다. 더위 해갈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재방문이라 익숙하게, 311구역에 헤매지 않고 앉았다. 3루쪽 원정팀 더그아웃 바로 뒷자리였다. 전광판에 떡하니 '폭염주의'가 떠올라 있었다. 얼굴에서도 가장 연약한 부위인 눈알이, 실시간으로 익어가는 것 같은 날씨였다. 모자도 눌러쓰고, 양산도 쓰고, 휴대용 선풍기에, NC의 굿즈인 이용찬이 그려진 '쫌' 부채까지 동원해 안간힘을 써봤다. 바로 옆 블록에는 커다란 리얼 선풍기를 들고 온 분이 있어, 아직 진정한 '야구 찐팬'이 되려면 멀었다고, 그 분을 보며 생각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구장인 사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낙후됐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1, 3루 내야 옆에 더그아웃과 나란히 불펜이 붙어 있어 경기 관람에 지장이 있다는 평을 보았는데, 투수 덕후인 나는 개인적으로 좋았다. 경기를 보며 불펜 상황을 '듀얼'로 볼 수 있었기 때문. 311구역도 그런 맥락에서 예매한 거였는데, 자세히보니 312구역은 돼야 불펜이 코앞이고 311구역은 정확히는 더그아웃 뒤에 가까웠다. 경기를 보는 내내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불펜을 기웃거렸다.


통상 NC와 롯데의 경기는 '낙동강 더비'로 주목받는다. 경남 사람인 나와 Y에게도, 낙동강 더비가 특별하게 와닿는 것은 비단 NC 창단 당시 롯데가 반대했다는 10여년 전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야구팬'이라고 얘기했다가 "그럼 롯데팬?"이라는 질문을 받은 무수한 역사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더욱 'C' 발음에 힘을 주어 "아니요. NC팬이요"라고 답하게 됐다. '경남 사람 = 롯데팬'이라는 공식이, NC 창단 1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통용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야구팬이 아니어서 '부산 연고는 롯데, 경남 연고 NC'를 모르는 이들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들에 속으로 송곳니를 드러내게 되는 까닭은, 경남과 부산을 하나로 퉁치려는 무수히 많은 시도들을 우리가 맞닥뜨려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 비해서야 부산이 친근한 경남 사람이지만, 부산과 경남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나 나름으로는 꼭 했었다. 서울로 유학 와서 가장 킹 받는 것은 부산 사투리를 경상도 사투리의 원형으로 보는 거였다. 이를테면 복학한 남학생들이 말하는 "오빠야~"라고 말하는 부산 여자 대한 환상 같은 거. 경남 진해에 15년을 살며 "오빠야~" 라는 말은 내가 하지도, 남이 하는 걸 들은 적도 없었다. 내가 나고 자란 진해는, 외지인이 많은 특성상(군항 도시라 전국에서 몰려든 해군 때문에)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짙지 않다. 부산 아이가 전학을 오면, 그 찐한 사투리 억양 때문에 다들 놀라할 정도였다.


특히나 사람들은 희한하게 자신이 모르는 지역성에 대해서는 하나로 뭉뚱거리는 경향이 있고, 그것의 미세한 다름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문화를 지배하는 수도권 사람들은 더욱 더. 서른명 남짓한 대학 동기들 가운데 유일한 경상인이었던 나는(지역에서 올라온 학생이 총 4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3명이 전라도 출신이고 1명이 나였다) '경상도 사람 = 부산 사람'이라는 오해에 맞서 늘 장광설을 풀어야 했다. 부산 사투리가 다르고 대구 사투리가 다르고 진해 사투리가 다르고 하는 것들에 대해. 그 인정투쟁의 장에서 나는 매번 고독해지고, 열이 뻗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그래서 사직에 왔더니, "경남에도 야구팀 있다!"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마음이 됐다. 그런 연유로 '낙동강 더비'가 더욱 치열한 걸까. 게다가 전광판에 선발 라인업이 뜨고, 타석에 손아섭이 들어섰을 때 기분이 오묘해졌다. 우리의 캡틴이 한 때는 롯데의 선수였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1번 타자~ 손아섭! 안~타~ 손아섭! 거침~ 없이~ 손아섭! 날려~ 버려~ 손아섭!" 하는 응원 구호를 목이 터져라 불러 제꼈다.


NC의 캡틴이자 리드오프, 손아섭.


그러나 사실은, 사직에 오면서 좀 쫄기도 했다. 롯데팬들이 워낙 기세가 대단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도 했고, 응원용품인 손바닥 모양의 클리퍼(짝짝이)의 소리가 위협적이기도 했다. 특히나 견제 응원의 시초라는 "마!"가 주는 임팩트가 상당했다. 전 구단 견제 응원 가운데 NC의 '쫌'과 더불어 가장 강성이며, '화끈한' 경상인이라는 내외부적 평가에 부합하는 구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3주 전 올스타전에서도 들었던 "안타 안타 쌔리라 쌔리라 롯데 전준우~" 할 때는 '쌔리라'를 응원가에 넣는 유이한 구단이어서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이날 경기는 NC 와이드너 vs 롯데 박세웅의 투수전이었다. 와이드너 선발 경기는 벌써 여러차례였던 지라 특유의 사이드암 수준으로 내려오는 쓰리쿼터형의 투구폼이 눈에 익어 있었다. 묘하게 좀 높은 위치에서 물수제비 뜨는 것 같은 폼이랄까. 와이드너가 NC 입단 이래 최고의 '인생투'를 펼치는 사이 롯데 '안경 에이스' 박세웅의 호투도 만만치 않았다. 올해 WBC에서 유일하게 욕을 안 먹은 투수인 박세웅은 7회까지 3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했다.



승부를 결정지은 건 NC의 불방망이였다. 박세웅은 7회까지 비교적 제몫을 하고 내려갔지만, 결국 경기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같은 이닝을 소화한 와이드너의 4피안타 1실점에는 못 미치는 기록이었다. 4회 말 선취점을 얻은 건 롯데였지만, NC는 6회 손아섭, 박민우의 연속 안타에 박건우의 2루타, 마틴의 희생플라이와 권희동의 적시타까지 터지며 3-1로 역전에 성공했다. 8회 권희동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더 얻은 후 9회에는 안중열-김주원-손아섭-박민우에 권희동까지 4점을 뽑아내 빅이닝을 만들었다. 손아섭과 함께 한때 롯데에 몸 담았던 포수 안중열의 롯데 유니폼을 입은 내 앞자리 여성 3인방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적잖이 궁금해졌다.


결국 사직 3연전은 2승 1패 NC의 위닝 시리즈로 막을 내렸고, 나와 Y는 들뜬 기분으로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롯데'에 이겨서 더 기분이 좋다고, 우리는 입을 모아 자주 말했는데 아무래도 '더비'는 더비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비오듯 땀을 흘려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지만, 승리 후 사먹은 달디단 밀크티 한 잔에 모든 피로가 겨 내려갔다. Y와 해운대 숙소로 오는 지하철에서 이것은 '환상통'을 넘어선 '환장통'(환상통+성장통)이라고, 서른도 한참 넘어서 아이돌도 아니고 야구선수들에 환장할지 몰랐다고 거울 보듯 서로를 보며 조잘거렸다.


불펜에 올망졸망 앉은 NC의 투수들.


매거진의 이전글 야구장 앞에서 전 직장 상사의 전화를 받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