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지만 혼자는 보기 싫었던 영화. 어느 토요일 강유가람 감독과 권김현영님의 GV가 있는 걸 알고 '혼자라도 갈까' 하던 새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 보러 가실래요?"
영화는 '98학번 영 페미'였던 감독이 그 시절 친구들의 오늘을 더듬어 찾아가는 내용이다. 반성폭력과 군가산점 위헌 등의 기치를 걸고 생활 속 성평등 실현을 위해 앞장섰던 그 시절 운동권 페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실 강유 감독의 얼굴이 워낙 동안이라 20대의 영영페미가 40대 영 페미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내용인가? 했는데 강유 감독 그 자신이 영 페미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로 지내다 지금은 전북 정읍에서 수의사로 일하며 소싸움 반대 시위에 나서고 있는 키라, 이대를 침범한 고대남들에 맞서 앙칼지게 인터뷰하던 짜투리는 결혼해 제주에 정착, 한달살기 민박을 운영하며 제주 농산물을 추려 육지로 보내는 일을 한다.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을 꾸리는 어라와 인디 뮤지션으로 사는 흐른이 있다. 마지막에는 당시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었으며 지금은 소장인, 자신은 영 페미가 아니라 영 페미의 팬이었다고 말하는 오매가 나온다.
페미니즘의 최전선에서 일한다고 볼 수 있는 어라와 오매가 아니어도 각자는 다들 자기 자리에서의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산다. 90년대 당시 매번 새로 단체를 만들고 운동을 조직하는 일에 골몰했던 짜투리는 제주에서 만난 여성단체에서 앞세대 언니들의 지혜를 절감하고 그들과도 연대가 가능함을 배워나가고 있다. 어라는 회원수만도 2000명이 넘는, '여성주의 건강관'을 추구하는 협동조합의 상무이사로서 조합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한다. 가난한 뮤지션 흐른은 생계와 음악 사이,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사실 말이 페미니즘의 최전선이지 그들이 사는 양태 모두가 페미니즘의 한 실천이어서, 최전선이고 아니고를 따지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가장 공감이 갔던 삶은 키라였다. 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였던 키라가 3년 만에 그 일을 접고 수의대에 간다고 했을 때, 모두가 충격이 컸다고 한다. 수많은 상담 사례를 접하는 일이, 모두에게 어려움이었겠지만 그에게는 더욱 큰 고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사람을 설득하기 싫어서, 동물을 만나는 일을 택했노라 그는 말한다. 제2의 꿈은 수의사라고 자주 말하는 나이기도 하고, 아마 그 시절 페미였다면 그처럼 가장 먼저 궤도에서 이탈하는 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놀던 가닥(?)을 못 버리고 참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개 둘, 앵무새 하나, 친구와 함께 사는 그는 내 고장 정읍에서 일어나는 비윤리적인 소싸움을 막기 위해 어깨에 선 앵무새와 함께 1인 시위에 나선다. 그 한 컷이 주는 영상미가 사뭇 비장하고, 생활친화적?이어서 웃음이 났다. 그 한 컷이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거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
영화가 끝난 뒤엔 바로 옆 라이브러리로 자리를 옮겨 권김현영 선생과 강유 감독의 GV를 들었다. 권김 선생도 영 페미이며 영화 속에 안희정 재판 2심 기자회견의 연사로 모습을 비춘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GV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질문을 받았는데 현재진행형 페미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밀도 높은 질문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어떻게 해서 계속 페미로 살 수 있느냐는 질문, 나로서도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 자신도 대학원 졸업 후 페미니즘과는 관계없는 직장에서 일하다 페미니즘에 관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강유 감독은 매일매일 순도 100%의 페미로는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 자체가 날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했다. 권김 선생은 "페미니즘 활동 할 때가 재밌었다"는 키라의 말을 언급하며 지금의 20대 친구에게 페미가 재밌다는 키라의 얼굴이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한 권김 선생은 당시 활동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유한 이미지였던 강유 감독이, 가장 정공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취지의 얘길 했다. 어머니로부터 기가 약해 감독할 수 있겠냐는 얘길 들었다는 그. 오래하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다고. 버티는 자가 제일 강한 자라는 상식에 가까운 진리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시절 위계를 없애기 위해 나이도, 이름도 모르고 활동명으로만 호명하던 동지들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 그들의 흔적을 좇을 수 없는 어려움도 얘기했다. 강유 감독이 찾은 옛 영상 속 그들의 행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단다. 그 시절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철저히 익명화 했겠지만 그것은 오래 가는 운동을 위해서는 걸림돌이 된다.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도 익명성으로 더욱 동력을 얻는 측면이 있지만 결국에는 모습을 드러낸 개인이야말로 전면적인 연대를 가능케 해 지속가능한 페미 되기를 뒷받침한다는 나의 어림짐작이 있다. (이 브런치에서 나의 오프라인 정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비를 뚫고 찾아간 펍에서, 후배와 맥주 한 잔을 했다. 후배는 점점 더 의지가지할 선배가 줄어든다는 얘길 했다. 어떤 롤모델로 존재했던 여성 선배들이, 일찍이 퇴사 길을 걷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나도 퇴사 생각을 늘 하는 사람이고 그걸 알고 있는 후배가 나를 보고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회사 후배들이 많을 것이라는 얘길 했다. 사실 나는 내 코가 석 자라 그런 식의 소명은 느끼고 있지 않고, 일찌감치 회사 안에서 롤모델을 찾으려는 생각은 시도조차 안했기에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정말로 선배는 몰라도 후배에 대해서는 나도 미안함...이 많다. 내가 부조리를 겪었을 때 가만 있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은 후배들을 떠올리며 더욱 가중되지만, 매번 화만 버럭 내는 나는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는데는 실패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 더 잘. 어떻게 해야 오래 또 오래.
오늘의 자리도 나는 생각만 하고, 감히 제안은 못했는데 먼저 보러 가자고 얘기해준 후배 아니 동료가 고맙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면서, 그리고 쉽게 지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생각하면서 글을 끝맺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