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에 나온 선수를 이렇게나 응원해 본 일이 꽤 간만의 일이다. 올림픽을 어느 순간 '국뽕 경연장' 정도로 보고 남들 잘하는 일에 뭐하러 몰입하나 했다.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분개하던 열혈 소녀는 이제 어디 갔나 싶었다.
그러다 올해 안산을 만났다. 그가 이미 두 개의 금메달을 거머쥔 뒤였음에도 나는 그를 경기 중계가 아닌 사람들 댓글 속에서 먼저 봤다. '숏컷 하면 다 페미임', '여자 숏컷은 다 걸러야됨' 등의 문장과 함께 그의 이름이 거명됐다. 거기에 여성들은 '#여성_숏컷_캠페인'으로 맹렬하게 맞서고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최초 보도했고(선수들에 “머리 짧으면 다 페미”… ‘숏 커트’ 인증으로 맞서다[젠더하기+])''숏컷'도 '페미'도 낙인이 될 수 없다')는 칼럼도 이어서 썼다.
그 사이 안산에게 붙은 온갖 낙인에는 '오조오억', '웅앵웅' 같은 '남혐' 언어를 썼다는 것, 마마무의 팬이라는 것, 숏컷한 여대 재학생이라는 것까지 더해져서 남초 커뮤니티들에선 금메달 박탈까지 논하며 테러 수준으로 사태를 키웠다. 여기에 여성들이 거세게 분노해 대한양궁협회 홈페이지에 안산 선수에 대한 응원을 더욱 보탰다. BBC 같은 외신들에서도 '안산이 성차별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개인전을 앞두고 안산 선수에 관한 보도가 쏟아지면서 사실 나는 걱정이 됐다. 혐오 댓글을 기사화해 괜히 그들의 스피커 역할을 대행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지금 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논의들이 큰 경기를 앞둔 선수의 멘탈을 흔들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더해졌다. 전자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나는 남성들의 낙인, 사상검증에 맞선 여성들의 숏컷 캠페인이 없었다면 그 기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트위터 상에서 여성들은 열심으로 연대하여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성의 자유이며, 페미는 낙인이 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바로 이 혐오의 시대 자체가 페미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간 얼마나 '페미'라는 말이 적들의 공격으로 오염돼 있었나. 그래서 우리는 종종 "나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을 마음에만 품은 채 살고 있었다. 최근 만난 페미니스트가 나한테 했던 말처럼. "슬기님처럼 카페에서 페미 얘기를 크게 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저는 누가 공격할까봐 좀 무서워서... 밖에선 그렇게 크게 얘기 못하거든요."
나는 수많은 댓글들 중 "올림픽 3관왕한테 누가 감히 뭐라 하느냐"는 얘기엔 동의 못 한다. 그것은 올림픽 3관왕이 아닌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보장된 권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안산 선수가 3관왕이 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세계 최정상에 우뚝 설 만한 실력을 갖춘 그가 '페미 논란'이라는 일부 언론, 남초 커뮤니티의 목소리, 혐오 댓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안산은 여러가지로 이겼고, 그를 응원하던 여성들도 함께 이겼다.
개인적으로는 그간은 몰랐던 올림픽 정신을 새롭게 알게 됐다. '왜 남이 잘하는 일로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한동안 나는 답을 잊었었는데, 이제는 알 거 같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일은 나를 응원하는 일과 같다는 것. 일상적 혐오와 차별에 둘러싸인 여성으로서의 내가 안산 선수를 응원하고, 어린 소녀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늘 힘에 부쳤던 과거의 나는 17세의 나이에 올림픽 무대에 오른 신유빈 선수의 오늘을 응원한다. 여성의 나이에 관한 갖은 혐오가 남발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내가 올림픽 도전 다섯 번에 빛나는 (신 선수의 상대)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 선수를 같이 응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승리는 나의 승리와 동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올해부터 다시 각잡고 올림픽을 보기로 한다. 페미가 안전한 세상, 다같이 페미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안산과 여성들은 기여했고 이 효능감과 성취감때문에 올림픽에 과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실에는 더욱 과몰입할 것이다. 그럴 기운을 충분히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