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서희 Feb 05. 2022

내 이름은 순돌이

내 이름은 순돌이

 

서서희


아카시아 향기가 솔솔 풍기던 날이야.

주방에서 할머니가 덜그럭 덜그럭. 맛있는 냄새가 나네. 내가 좋아하는 소시지 냄새야. 슬슬 배가 고픈데...

“순돌아, 할머니 두부 좀 사 오마, 텔레비전 보고 있어라.”

네, 할머니.

지금은 뽀뽀뽀 시간이라 누나들이 춤을 춰. 신나는 음악이라 나도 따라 췄지. 근데 엉덩이가 내 맘대로 안 되네.

할머니, 갔다 와서 나랑 같이 춤추자!

그러자는 소리에 이어 현관문이 닫혔어.

너무 힘들어서 좀 쉬고 있었지. 어, 왜 이리 조용해? 할머니 안 왔어? 배고픈데...

할머니, 나 배고파!

할머니 어딨지? 아무 소리가 없네. 방에도, 화장실에도 할머니가 없어. 베란다에서 바깥도 봤지만 우리 벤치에도 할머니가 없어.

할머니, 어딨어? 순돌이 배고파!

3층 베란다 창문에서 할머니를 부르고, 또 불렀어. 나는 무서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 어두워지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울면서 얼마나 할머니를 불렀는지 몰라. 할머닌 대체 어딜 간 거야?


내 이름은 순돌이야. 나는 할머니와 둘이 살아. 예전에는 엄마, 아빠, 순희 누나, 순남이 형과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혼자 계신 할머니랑 살아.

순희 누나랑 순남이 형은 할머니 집에 와도 게임만 하거든. 할머니랑 놀지도 않고, 집에 가자고 떼만 쓰고. 나는 안 그래. 나는 엄마도 좋지만 할머니랑 노는 것도 좋아해. 그래서 있으라고 했나 봐. 학교에 안 가니까 너는 괜찮다고 하면서...

싫어. 나도 엄마랑 살래!

안 된다고 소리 지르고 울기도 했지만 소용없었어. 더 떼를 쓰려다가 할머니가 서운해할까 봐 더 못했지. 엄마 아빠랑 살고 싶은 거지, 할머니가 싫은 건 아니니까.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자전거에 치일 뻔한 나를 구해준 할머니야. 건너편 할머니만 보고 뛰었는데, 글쎄 자전거가 달려오잖아. 할머니가 막아서 다행이었지. 나 대신 할머니가 많이 다쳤어. 그래서 울지도 않고 더 잘하려고... 가끔 밤에 몰래 울기는 해. 엄마 보고 싶을 때면...

매일 와서 순돌이랑 놀아야 돼!

"순돌아, 엄마 매일 올게. 할머니랑 잘~ 놀아."


엄마는 할머니 집에 오면 제일 먼저 나를 안아주고는 미안하다고 하셔.

"순돌아, 할머니랑 잘 지내지? 엄마가 미안~."

맛있는 것도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그리고는 할머니 밥이나 반찬, 청소도 해 놓고 가. 그래도 나는 엄마 온 게 좋아서 얼마나 떠드는지 몰라. 온 집안을 뛰어다니면서 말이야. 엄마가 온 날은 할머니도 화장을 곱게 하고 환한 얼굴로 앉아계셔.


할머니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사는 내가 외로울까 봐 외출할 때도 꼭 데리고 다녀. 장 보러도 다니고, 손을 꼭 잡고 산보도 같이 해.

“순돌아, 마실 가자.”

네, 할머니.

나는 착한 손주라 할머니 손을 꼭 잡아, 넘어지지 않게. 할머니가 팔십 대라고 하면 믿지 않아. 그래도 가끔은 힘들어하셔. 열심히 운동장을 돌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할머니, 애가 너무 귀엽네요.”

할머니! 나랑 미끄럼틀 타자.

“그래, 오랜만에 할미도 미끄럼틀 탈까?”

어, 할머니. 조심해. 다쳐!

할머니는 가끔 나이를 잊어서 탈이야.

“어머, 할머니. 애가 너무 착해요.”

그러면 할머니는 허허 웃지. 주름진 얼굴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개나리 꽃처럼 아직은 고우셔.


그런데 한 달 전인가 내가 길을 잃고 고생한 적이 있었어. 할머니 손을 잡고 걷다가 할머니 손을 놓쳤는데, 할머니가 그냥 가 버린 거야. 그곳은 복잡한 시장이어서 길을 못 찾겠더라고.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고 있는데, 어떤 누나가 나를 경찰서에 데려다줬어. 그래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어떻게 손주를 놓고 올 수가 있어!

할머니, 어떻게 나를 놓고 갈 수가 있어. 너무해!

“에고, 순돌아. 미안타. 내가 노망이 난 모양이다. 고생했지?”

꼭 껴안고 사과를 하니 화를 풀 수밖에.

할머니, 다음부터는 내 손 꼭 잡고 다녀!

그 후로 나는 순돌이라는 이름과 할머니 전화번호가 적힌 예쁜 목걸이를 하게 됐어. 내가 좋아하는 뽀로로 모양이 새겨져 있는 거야.

그런데 이상한 건 어느 날 할머니도 나랑 똑같은 목걸이를 한 거야.

할머니, 나랑 똑같은 목걸이네?

“그래, 순돌아. 내가 좀 정신이 없는 것 같아서. 너도 자꾸 잃어버리고. 내 가족은 너 하나뿐인데 너를 잃어버리다니... 그래서 너랑 커플 목걸이 해 달라고 했다. 순돌이 할미라고 넣어서... 어때, 예쁘지? 나도 뽀로로란다.”


가끔은 혼자일수록 많이 움직여야 한다면서 할머니는 저녁에도 운동을 나가자고 해.

"순돌아, 할미랑 운동 갈래?"

그래, 할머니.

내가 간다고 하면 할머니는 좋아해. 그런데 운동장에서 내가 모래 장난도 하고 한참을 노는데도 할머니는 의자에만 앉아 있어. 옛날에는 나랑 같이 잘 놀아줬는데... 그래서 내가,

할머니, 이제 집에 가자.

그런데 할머니가 좀 이상하네.

“너 누구니? 왜 나한테 와서 귀찮게 굴어. 저리 가!”

어! 할머니, 나 순돌이. 왜 그래, 할머니?

할머니는 한참 동안 멍하니 날 보더니,

"응? 순돌이구나. 아이고 내 새끼, 그래 집에 가자."

하더라고.

같이 있던 옆집 할머니가,

“순돌이 할멈, 왜 그래? 어디 아파?”

하면서 걱정하셨어.


할머니는 그 후로 엄마랑 자주 병원에 가셔. 드시는 약도 많아졌고. 할머니 옷에 이상한 걸 붙이기도 해. 할머니가 길을 잃을까 봐 붙이는 거래. 그래도 가끔은 “순돌이, 내 새끼.” 하다가, “너, 누구니. 저리 가라.” 하시니,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어. 할머니가 걱정되기도 하고...

지난번에도 엄마가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어.

“어머님, 왜 약이 이렇게 많이 남아요? 약을 잘 챙겨 드셔야지.”

“내가 요즘 깜빡깜빡한다. 늙으면 다 그런 거지, 뭐. 너무 걱정 말아라”


어제는 전화가 왔어, 큰아버지 오신다고. 큰아버지 오신다고 하면 할머니는 너무 좋아하셔. 엄마가 해다 주신 반찬이 많아도 큰아버지 좋아한다고 돈가스 튀긴 것을 여러 장 사 오셔. 아파트 안에 알뜰시장이 매주 한 번씩 서거든. 큰아버지 좋아하는 육개장도 사 오시고... 큰아버지는 그러지 마시라고 하지만, 할머니가 큰아버지 앞에 앉아 이거 먹어라, 저것도... 하시니 할 수 없지, 뭐. 가끔은 큰아버지가 "순돌아, 이것 좀 같이 먹을래? 너무 많구나." 하시면서 몰래 주기도 해.  

네, 큰아버지. 저도 돈가스 좋아해요.

그러다 가끔 설사를 한다고 할머니께 꾸중을 듣지만...


할머니가 없는 무서운 밤이 지나고 한참 후에야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왔어. 그런데,

"어머니, 이리 앉으세요. 점심 드셔야죠."

"아주머니, 누구세요?"

"어머니, 왜 이러세요? 어머니 며느리잖아요."

"그러세요?"

할머니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어. 나를 보고도 "내 새끼" 하면서 안아주지도 않고, 힘들어하면서 그냥 소파에 누우셔.

조금 있다가 큰아버지가 헐레벌떡 숨차게 들어오셨어.

"어머니, 어디 가셨던 거예요?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요! 제수씨, 어머님이 어디 계셨다고요?"

"돈암동 집 근처 경찰서인데, 순돌이 할머니 집이냐고 전화가 왔어요. 놀이터에 웬 할머니가 계속 앉아계신다고 민원이 들어왔대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목걸이랑 스티커 덕을 봤네요."

큰아버지는 할머니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

"어, 아비 왔구나. 아비야, 왜 우니? 에미는 안 왔니? 니 애들은? 애들 보고 싶다. 여기가 어디니? 돈암동 우리 집에 가자!"

"어머니, 돈암동 집이 어디 있어요? 어느 옛날에 판 집인데..."

큰아버지는 할머니 말씀에 놀라면서 할 말을 못 하고 말았어. 모두 다...

엄마도 옆에서 울다가,

"어머니, 너무하세요. 이십 년을 모신 저는 못 알아보시면서..."


그 후 큰아버지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신다고 몇 번을 집에 오셨지. 할머니는 안 가신다고 버텼지만 결국 요양원에 가셨어. 나는 다시 집으로 왔어. 순희 누나, 순남이 형 동생인 순돌이로. 나는 너무 좋아서 집안을 온통 뛰어다니면서 좋아했지.

"멍멍! 멍멍!"


그래도 가끔씩 할머니가 생각나. 자전거로 달려드는 나를 살리려고 길 위로 구르셨거든.  

할머니, 어디 계세요? 보고 싶어요!


* 오늘은 추워서 필드를 못 나갔습니다. 예전에 쓴 동화로 대신합니다. 죄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