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 동생 윤자
서서희
저녁 무렵 웬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나가니, 배가 많이 부른 아줌마와 내 또래 여자 아이가 서있었다. 나는 뒤돌아서면서,
"엄마, 손님 오셨어요!"
했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나와서 두 사람을 작은방으로 안내했다. 뒤따라 들어가는 아이가 낯이 익었다. 우리 반 일등인 미자랑 닮았다. 미자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모두들 좋아하는 아이였다. 친구가 되고 싶어 그 애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많이 닮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서면서 금방 잊어버리고는 그냥 밖으로 나갔다. 골목 앞 구멍가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아 참, 오늘 우주선이 달에 도착한다고 했지.’
동네 한 대뿐인 테레비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떠들썩했다.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는 달에 사람이 갔다고 난리가 났다. 저기에 사람이 어떻게 간 거냐고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나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둥근 모자를 쓴 우주인이 허공을 나는 것처럼 달에 발을 대는 신기한 광경을 구경했다. 우리는 여기 땅속에서 석탄을 캐면서 사는데, 저 우주인은 땅이 아니라 진짜 저 위에 있다는 게 사실일까?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도 크면 달에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집으로 뛰어갔다. 늦게 들어가면 야단맞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다행히 엄마에게 들키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작은방에서 그 아이가 나왔다.
"어! 미자야. 진짜 미자구나. 너, 여긴 웬일이야?”
"저 정희야, 여 여가 너네 집이나?”
미자는 얼굴이 뻘게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우리 집은 조산원이다. 아기 낳는 것을 도와주는 집. 엄마는 읍내 병원 간호원도 하지만 집에서는 조산원을 하고 있다. 나는 가끔 엄마, 엄마 부르며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것도 잠결에 듣고, 잘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하는 엄마의 말도 뒤척이다 듣곤 했다.
나는 아홉 살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엄마를 따라 삼척으로 내려왔다. 엄마가 취직한 병원은 아는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낮에는 간호원으로, 밤에는 조산원으로 일하면서 엄마는 오빠와 나를 공부시켰다. 오빠는 중학생이라 서울에서 공부해야 하니까 서울 다섯째 이모집에 있게 하고, 엄마와 나만 삼척으로 내려왔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래서 왜 같이 안 사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보면 안 된다고, 그냥 그래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대신 나는 이모들이 많았다. 외할아버지는 아들을 낳으려고 딸을 여덟이나 낳았는데, 결국 못 낳았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팔공주 집 셋째 딸이다. 가끔 이모 식구들과 모여 만두나 빈대떡을 해 먹었는데, 그런 날은 집이 북적북적했다. 큰이모네만 빼고 형제가 둘씩인데 그래도 모이면 많은 식구였다. 다 같이 모이는 그런 날은 뭐든 배가 빵빵하도록 먹었다. 그런데 가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모들이 다신 안 볼 사람처럼 싸워서 좀 무서울 때도 있다. 그런 날은 모두 자기 엄마 눈치를 보느라 못 먹곤 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온 나는 애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애들이 쓰는 사투리가 낯설어서 그렇기도 하고, 말할 때마다 빤히 쳐다보는 애들 때문에 괜히 부끄러워서 그렇기도 했다. 특히 수업시간에 책을 읽는 게 싫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 선생님은 잘 읽었다고 칭찬하시는데 애들은 수군거렸다. 잘 읽었다는 건지, 못 읽어서인지 뒤에서 킥킥대고 웃는 그런 수군거림이 나는 너무 싫었다. 어떤 때는 서울 가시나라서 뭐든지 잘한다고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울 가시나라고 얕잡아 봤다.
하지만 미자는 달랐다. 뭐든 앞장서서 맞으면 맞다, 틀리면 그르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고, 모든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담임선생님도 심부름은 모두 미자에게 시켰다. 나도 그런 미자와 친하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고 똑똑하고 야무진 미자가 지금 내 앞에서 뭐가 힘든지 더듬더듬 말하고 있다.
미자와 미자 엄마는 동생을 낳으러 왔다고 했다. 여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또 동생이라니, 아들을 낳으려고 딸을 여덟이나 낳은 외할아버지처럼(?)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안 오셨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조산원에 남자가 온 적은 없었으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미자는 학교에서완 영 딴판이었다. 뭐가 불안한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 안 가고 여기 있는 게 걱정되어서일까?
"미자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동안 여기서 애기 많이 낳았어!"
나는 미자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미자는 억지로 웃는 시늉만 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아줌마가 아파하기 시작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그때부터 아픈 것을 참느라 내는 아줌마의 신음소리 때문에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뒹굴다가 미자와 미자 동생들 생각도 하고, 아들을 낳고 싶어 한 외할아버지 생각도 했다. 우리 집은 오빠와 나뿐이라 항상 조용하지만, 미자네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 집도 만두를 해 먹는 날이면 식구가 많아져 북적북적해지곤 했으니까. 사촌끼리 집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노느라 법석댔고,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고 싸우기도 했다. 미자네도 그럴까? 서로 싸울까, 아니면 알콩달콩 재밌을까?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늦게야 잠이 들었다.
자다가 큰 소리에 놀라 깼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 애기가 나왔나? 아직인가? 나는 잠에서 깬 김에 변소에 가려고 나오다가 ‘애가 거꾸로 앉았다’는 엄마 말을 들었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별생각 없이 변소에 갔다 들어가는데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애기 엄마. 손으로 여기를 문지르면서 애기한테 말해요. 머리가 먼저 나와야 엄마랑 만날 수 있다고, 네?”
"아이고, 선상님. 배때기 속 언나가 떠드는 걸 알아듣는대요?”
"못 알아들어도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정상적으로 나오지 못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늦으면 잘못될 수도 있어요. 엄마도 애기도 지금 너무 위험하니까, 어서요!”
"야. 언나야, 니가 어머이 좀 도와줘야 되잖나? 얼른 나와야재. 머리를 돌래야 나온다, 언나야. 어머이 얼굴 빨리 볼라믄 머리 좀 돌래라. 지발…….”
그런 말을 듣고서도 나는 그냥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와 다시 잠이 들었다.
어디서 비명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꿈결에 아기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눈을 못 뜨다가 엄마가 문 여는 소리에 깼다. 돌아누워 다시 자려고 하는데, 엄마가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죽다 살았는데 웃어야지, 울긴 왜 울어?”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잠에 취해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학교에 가자마자 애기 얘기를 하려고 미자를 찾았다. 하지만 찾지 못하고, 금방 수업 종이 울렸다.
"미자야, 동상 낳았나? 이쁘나?”
숙제 검사를 맡고 들어오는데, 미자 짝꿍이 물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응. 여시게 동상이여. 이쁘다.”
"아부지가 좋아하시나?”
"그럼. 어머이 고생했다고, 이쁘다 하시재.”
"이름은 짓나? 미자. 영자. 순자. 언나 이름은 뭐야?”
"응…….”
한참을 망설이던 미자는,
"윤자…….”
"윤자? 이름 좀 이쁘네. 누가 짓나?”
"아부지가…….”
예쁜 이름을 아버지가 지었다고 하니까, 짝꿍은 별말 않고 그냥 숙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자는 짝꿍 말을 듣기만 할 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윤자?
아기 이름이 윤자라고 하니까 엄마 생각이 났다. 아들을 낳기 위해 딸만 여덟을 낳은 외할아버지, 그리고 팔공주 집 셋째 딸인 엄마. 아버지 없다고 무시할까 봐 무엇보다 공부를 강조하는 엄마였다. 한자를 모르는 나에게 한자가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신 엄마 이름 윤남, 오로지 윤 사내 남이라고 했다.
윤자, 윤남? 엄마가 오로지 윤, 사내 남이라면 윤자는 오로지 윤, 아들 자?
바람이 불면서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서울보다 더 추운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읍내로 가는 길이었다. 엄마가 계시는 병원에 갔다 오라고, 명절을 앞두고 원장 선생님께 드릴 선물이라고 했다.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열심히 걷는데, 앞에서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재밌는지 여럿이서 낄낄대고 있었다.
‘어? 미자다. 미자네 식구들이구나.’
아는 척할까 하다가 그냥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한참을 가는데 아줌마가 힘이 드시는지 멈춰 서서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미자가 옆에서 엄마 팔짱을 끼며,
"어머이 힘드나? 천천히 가요.”
"아이다, 괜찮다.”
어?
미자네 아줌마가 이상했다.
아…….
그제야 미자가 아직도 나를 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엄마에게 아버지 얘기를 묻지 않는 것처럼, 미자도 여동생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겠지. 또 동생이 태어난다는 얘기도.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미자가 조금 서운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나는 그냥 미자와 친해지고 싶을 뿐인데…….
그래도 나는 미자 동생 윤자가 그리고 또 태어날 윤자 동생이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형제가 많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미자네가 부럽고 또 부러웠다.
* 제가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길은 동화작가입니다. 새를 소재로 하는 환경동화라고 할까요. 아직은 그런 수준이 되지 못해 이것 저것 써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