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서희 Apr 20. 2022

엘리베이터 통신

엘리베이터 통신 


글 서서희


퇴근길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탄 벽창호 씨는 13층을 누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새로운 안내문이 붙은 것 같아 내용을 보려고 눈을 뜬 벽창호 씨는 기겁을 했다. 감히 관리소에서 붙인 안내문에 낙서를 하다니? 어린애 글씨처럼 삐뚤빼뚤한 글이 적혀 있었다.                              

------------------------------------

지하주차장 자전거 진입금지 안내

우리 아파트 단지의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진입로에는 자전거가 통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지하주차장까지 자전거로 진입하는 경우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하 통로에서는 반대 방향의 자전거는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경광등의 울림도 없어 사고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안전사고를 사전에 예방코자 입주민 여러분의 세심한 주의를 당부드리며, 자녀에 대한 안전 교육과 지도에도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22. 3

○○○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주차선이나 잘 지켜서 주차하세요!

------------------------------------

'어, 요거 봐라. 요런~ 어린것들이 안내문에 낙서를 해?'

벽창호 씨는 이런 몰상식한 아이들은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은 또 다른 글씨가 안내문에 쓰인 것을 볼 수 있었다.   

-------------------------------------              

어린놈이 맹랑하구나. 어른들이 말하면 '네' 하고 조심할 것이지!

-------------------------------------

정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엄마의 이혼으로 아빠와 살게 된 정수는 아빠가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면서 다시 할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힘들게 사시는 할아버지한테 나까지 맡기게 되어 죄송하다면서, 아빠는 나에게도 무척 미안해하셨다.

“정수야, 할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돼. 아빠가 우리 정수랑 같이 살려면 지금은 돈을 좀 모아야 하니까, 그때까지만 할아버지랑 잘 지내라. 잘할 수 있지?”

“네, 아빠. 그 대신 빨리 돈 모아서 나 데리러 와야 해요?”

아빠가 내려가신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이제 정수도 5학년이다. 아빠는 중학교 때는 같이 살 수 있겠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하셨다. 아빠는 명절 때면 꼭 올라오긴 하지만 평소에는 차비도 아낀다고 전화만 자주 하셨다.

“정수야! 밥 먹었냐? 할아버지가 휴지 줍느라 좀 늦었다.”

“네, 할아버지. 저는 밥 먹었어요. 할아버지 시장하시죠? 제가 차려드릴게요.”

할아버지는 15층 임대 아파트에 사셨다. 작은 아파트이긴 하지만 단지가 커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옛날 살던 아파트보다 조금 시끄럽기는 했다.

“아니, 누가 재활용 수거일도 아닌데, 종이박스를 내놨지? 누구야, 이렇게 몰상식한 사람이? 임대아파트지만 우리도 명품아파트 소리 좀 듣게 조심합시다. 임대아파트는 명품아파트 되면 안 된답니까?”

우리 동 반장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활용, 분리수거, 담배꽁초, 계단에 물건 적치하지 말라는 것까지 반장 아줌마는 언제 어디서나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반장 아주머니의 잔소리로 많은 분들이 세심한 부분까지 조심을 하는데도, 오래된 아파트다 보니 이곳저곳 지저분한 데가 많았다. 그래도 정수는 놀아줄 친구들이 많아서 이 아파트가 좋았다. 아빠가 없는 빈자리도 잊게 해 주었다.


"정수야, 자전거 타자!"

"그래. 한 시간만~ 놀이터!"

정수는 카톡을 끝내고 안전장비부터 먼저 챙겼다. 10층에서 자전거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탄 정수는 벽에 붙은 안내문을 훑어보다 자전거라는 글자를 보게 되었다. 정수는 안내문을 보면서 고개를 꺄우뚱했다. ‘자녀에 대한 안전 교육과 지도?’ 갑자기 정수는 '욱'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수는 학교가 끝나면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자전거를 탔다. 공을 차면서 놀기도 하지만 요즘은 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제는 10층에서 자전거를 끌고 지하 1층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입구를 막고 주차한 외제차 때문에 애를 먹었다. 사람이 지나가도록 주차가 금지된 공간이었지만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자동차를 긁을 것 같아 자전거를 들어 올려 조심조심 나오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탈 때 항상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사고도 조심해야 하지만 자동차 옆을 지날 때는 더 조심하라고. 조그만 아파트에 웬 외제차가 이리 많냐고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 그래서 정수도 항상 조심조심 주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린 우리만 잘못한다고?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어른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어리다고 해서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곤 하셨다. 언제든지 옳다고 생각하면 자기 의견을 똑바로 얘기해야 한다고…….


다음날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안내문에 쓰다가 나중에는 쓸 곳이 없어 포스트잇이 붙었다.        


----------------------------------------

- 저희 부모님은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하라 하셨어요.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셔야지요. 주차구역에 바르게 주차해 주세요.

- 애가 말 참 잘하네요. 어른이나 애나 지킬 건 지키자는 말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 주차를 잘못하는 분들이 많으니, 아이가 이런 말을 하지요.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 바로 앞에 주차하시는 분이 더 잘못하시는 것 아닌가요?

- 우리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 자녀 교육에 신경 좀 쓰시지요.

- 자녀 교육은 잘 받고 있습니다. 어른 교육 좀 시켜주세요.

--------------------------------------------


그때부터 벽창호 씨는 아파트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3층에 사는 저 아이가 낙서를 했나? 아니지, 저 아이는 부모님이 멀쩡하던데. 만나면 인사하라고 가정교육을 시키는 집인데…….'

'6층에서 내리는 저 집에 아이가 있나? 고개만 까딱하는 저 사람, 가정교육이 엉망일 거야?'

'아니야, 15층에 사는 사람이 낙서할 확률이 많지 않겠어? 그 집에 한번 찾아갈까?'

벽창호 씨는 맨 처음 낙서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사람들을 살피면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느 날 정수는 자전거를 싣고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다 13층 아저씨를 만나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응, 10층에 사는구나. 몇 호지?"

"네. 1004호예요."

"응. 아파트 관리 깨끗이 해주시는 할아버지네 집이구나? 할아버지 건강하시지?"

"네."

"그래, 자전거 조심해서 타라~"

벽창호 씨는 10층도 제외시켰다. 벽창호 씨는 마지막에 내리면서 사람들 없는 틈을 타 재빨리 포스트잇을 붙였다.


------------------------------

- 너 누구냐? 얼굴 좀 보자!

-------------------------------


소강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관리소에서 안내문이 붙었다.     


---------------------------------

안내문 낙서에 대한 관리소의 입장

이번 엘리베이터 안내문에 어떤 형태로든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의견을 참고하여 정리했으니 다음 사항을 잘 지켜주십시오. 우리 모두 이웃을 배려하는 주민이 되었으면 합니다.

-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때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와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엘리베이터에서 지하주차장으로 나가는 곳에는 주차하실 수 없습니다. 자전거가 지나다가 긁을 수도 있으니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 관리소에서 붙이는 안내문은 공공문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낙서를 하기보다는 정식으로 의견을 써서 관리소에 가져다주십시오. 아울러 포스트잇으로 의견을 붙이는 것은 미관상 적절치 않은 것 같으니 자제 부탁드립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주치는 분들끼리 서로 인사하면서 지내는 아파트, 아래윗집이 정다운 아파트가 될 수 있도록 주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2. 4

○○○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


얼마 후 새로운 안내문이 붙었다.  

--------------------------------------------------

- 507호에 새로 이사 온 집입니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라도 인사드리면 반갑게 받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반갑습니다. 사이좋은 이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다음에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

- 저는 809호에 사는 이 아파트 반장입니다. 어려운 일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 15층에 사는 사람입니다. 반가워요. 매일같이 이곳을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 감사드립니다. 아, 참. 반장 아주머니도 고맙습니다. 명품아파트 만드시느라 고생이 많으세요.

- 헤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 12층 아기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가 밤에 자꾸 뛰어다녀서 죄송합니다. 주의시키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죄송해요.

- 아, 뭘요. 아이들이 클 때는 그럴 수도 있지요. 괜찮습니다.

- 9층에 계시는 분들 저희 친정어머님이 치매에 귀가 어두우셔서 테레비 소리가 좀 클 겁니다. 밖에까지 들리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 노인네 계신 집은 그럴 수 있지요. 이해합니다. 노인네 모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


밤늦게 엘리베이터를 탄 총알 배달원은 아파트에 붙은 안내문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지난번엔 주차나 잘하라는 낙서였는데, 이번에는 웬 게 이리 많이 붙었어?'

매거진의 이전글 미자 동생 윤자(동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