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없었다.
누군가와 크게 다툰 것도 아니고,
당장 해결해야 할 큰 문제도 없었고,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루는 유난히 무거웠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몸보다 마음이 먼저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루의 절반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날을 두고
“그래도 잘 버텼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말해왔고,
그 말에 기대어 하루를 넘겨왔다.
하지만 어떤 날은
‘버텼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버틴다는 말에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느낌이 있다.
이를 악물고라도 견뎌냈다는
어딘가 단단한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를 악물 힘도,
견딘다고 말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루가 흘러가길 기다렸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말이 없었다.
“왜 힘들어?”라는 질문 앞에서
대답이 막혔다.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아서였다.
쌓이고 쌓인 피로,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말하지 못하고 넘겨온 순간들,
괜찮은 척 지나온 날들.
그 모든 게
아무 일 없는 하루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때면
‘나는 왜 이것밖에 못 버티나’
‘다들 이렇게 사는 건데 왜 나만 힘든가’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날이 있다는 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많이 애써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계속 강할 수는 없고,
매일 괜찮을 수는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날이 있는 것도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의 나는
버텼다고 말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고,
무너졌다고 말하기엔
아직 서 있었다.
그래서 이 하루는
버틴 하루가 아니라
그저 지나온 하루에 가까웠다.
아무 일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지는 않았던 하루.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하루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마음을 다 써버린 하루였다.
이런 날엔
잘 버텼다는 말 대신
이 말이면 충분하다.
“오늘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일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고,
또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기로 한다.
버틴다는 말로 부족한 하루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인정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하루를 지나온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쉬어도 된다고
조용히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