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 째 이야기
1978년의 기록
요즈음 들어 퇴근 시간이면 꼬박고박 늦지 않고 집으로 곧장 오는 남편을 위해 낮에는 특별히 시장을 좀 보았다. 고맙기도 하고 또 월급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의 숫자 하나 틀리지 않는 월급봉투를 건네주는 그에 대한 은근한 답례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가 좋아하는 명란이랑 생굴 같은 걸 사고 또 접시에 상추를 깔고 제법 상큼하고 비쥬얼 있는 저녁상을 차렸다.
네 살배기 큰 녀석이랑 아기랑 예쁘게 씻겨서 머리를 빗어 주면서
“조금 있으면 아빠가 오실 테니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해라. 응?”
가르치는데도 괜스레 부푼 기분이었다.
옆집, 앞집에도 귀가하는 아빠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창밖이 어두워졌다.
이 번 달에는 보너스가 나오니까 연탄도 좀 더 들여놓아야겠고 남편 속내의랑 애들 털 구두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가계부를 펼쳐놓고 한참동안 골똘히 예산을 세우다가 후닥닥 생각난 게 있어 나는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이 달에는 저희가 보너스를 탄대요. 그러니 내일 나오셔요. 안경 하나 좋은 거 골라 드릴게요.”
몇 달 전부터 벼르기만 해 오던 그 말씀을 드리고 또 어머님의 기뻐하시는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내가 선물을 받은 것보다도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기다리다 못해 꼬마들 먼저 저녁을 먹여 재우고, 가계부 예산을 서너 번이나 바꿔가며 해 봐도 남편은 오지 않는다.
‘이상하네. 무슨 일이 있나? 그렇다면 전화라도 한 통 해 주었을 텐데....’
답답함을 참고 기다렸지만 한 시간, 두 시간 지루한 시간은 자꾸 가고, 드디어 나는 방정맞은 걱정과 불안한 생각까지 다 동원해 가며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당신이야? 난데...”
“무슨 일이예요? 빨리 오시잖고?”
나는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그는
“여보, 큰 일 났어.”
이러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미안해서 어떡하지? 월급봉투를 잃어버렸어.”
“뭐라구요?”
그의 목소리는 약간 술에 취해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월급봉투를 잃어버리다니...!
“여보, 당신 지금 꽃다리까지 나와 줄 수 있겠어?”
“왜요? 왜 그래요?”
“내가 술이 좀 취했나 봐. 그러니 좀 나와 줘.”
“알았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나는 달려 나갔다. 걱정스럽게 뛰어가는 내 다리는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어머님께 전화라도 하지 말 걸. 어쩌다 한 달 동안 고생한 월급봉투를 잃어버렸을까? 액운을 때운다더니 그런 걸까?’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들을 무질서하게 떠올리며 걸어가는 동안 그래도 내 마음 속에는 남편을 만나면 나보다 더 놀라고 허전해 할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급했다.
가로등 빛을 받으며 꽃다리 난간으로 커다란 덩치의 남편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여보, 괜찮아요. 그까짓 돈. 당신만 무사하면.”
나는 와락 달려들면서 그 말부터 했다. 그런데 그만 어린애같이 울어졌다. 남편의 손길이 내 등을 토닥여 주고 옷자락에 눈물이 닦여질 때 문득 그는 내 앞에 돈뭉치를 내미는 거였다. 월급봉투였다. 그리곤 함께 자잘한 선물 꾸러미까지 주었다.
나는 입이 딱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잃어버리긴, 내가 바보야? 이 소중한 걸 잃어버리게? 당신 마중 나오게 하려고 그랬지.”
“아이 정말 뭐야? 그래도 당신 진짜 너무했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두 주먹으로 펑펑 그를 때렸다. 그랬더니 그는 두 팔로 꼼짝 못하게 끌어안았다.
다리 난간에서 먼 가로등 빛을 받으며 우리는 오랜만에 연애시절의 모습같이 한동안 그렇게 그림자를 남기고 서 있었다.
잠 든 애기 얼굴에 수없이 뽀뽀를 해 주다가 남편은 술기운으로 쉽게 잠이 들었다. 작은 방 안에 그나마 서로 밀착해서 붙들고 잠이 든 사이로 나도 풍선처럼 행복을 부풀어 올리며 조심스레 비집고 누웠다. 가슴엔 흘러넘치도록 사랑이 충만해져서 아기들이랑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자동으로 계좌이체가 되어 월급 봉투를 잃어버릴 일이 없겠지만 그 때는 월급 날이면 봉투 안에 현금을 받았다. 그걸 받아들고 손으로 지폐를 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