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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Aug 31. 2022

헤르만 헷세에게 던지는 질문(2)

'데미안'은 읽고 난 후

<헤르만 헷세에게 질문>

- 편안에 이르셨는가요?

-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무었을 하시나요?

- 감정과 감각이 바로 속세이자 현실의 실체로 느껴집니다. 깨달음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데미안'은

자신 탐구에 경험이 많은 헤세 아저씨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작품이다.

이미 유명한 작가 아저씨의 진부한 이야기를 만들기보다는 비슷한 젊은이가 직접 체험한 경험을 다른 젊음 이에게 들려주는 식의 성장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나 보다.


이원성

다른 것, 부조리한 것, 이상과 동떨어진 삶의 이면에서 주인공은 알 수 없는듯한 문제를 느낀다. 헤세의 다음 책 <싯다르타>에서도 종교적 삶과 속세에서 삶의 깨달음을 다룬다.

무언가를 인지하고 사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여 현상을 설명한다. 여러 사건들의 집합인 현상은 긴 스팩트럼을 가지고 각 사건마다 다른 특색을 가지지만 편의를 위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소통한다. 예를 들어 어둠과 빛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빛의 부재지만 각기 다른 것으로 인지된다. 본질은 하나이거나 본질은 현상 그 자체지만 그것을 하나로 퉁쳐서 정의하고 설명하는 말을 사용하다 보니 본질은 퇴색된다. 3차원 공간은 채워져 있거나 비워져 있다. 컵에 들어있는 물이나 쇠 덩어리는 채워져 있는 공간이고 물건이 부재하는 공간은 비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시광선의 세계(눈으로 보는 것)보다 깊이 들어가 본질을 찾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 원자와 전자의 세계에서는 그 빈 공간이 의미가 없다. 원자핵(+)은 운동에 있는 축구공만큼 작고 전자(-)는 그 운동장 밖을 도는 만 지만큼 작은 점(크기가 없다. 점이다)에 불과하다. 사실 거의 빈 공간이지만 +-전자기력이 있어서 원자는 축구공 만하게 보이고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사실 공기가 채워진 빈 공간이나 물이나 고체가 채워진 공간은 똑같이 비워져 있으나 채워져 있다. 원자가 모여서 분자가 되고 산소나 이산화탄소 등의 분자들로 이루어진 공기가 없는 공간이 진공이다. 펌프를 이용하여 만들 수 있는 '중진공'상태에서도 분자들이 일부 들어가 있다. 완전 진공에 가까운 우주공간에서도 여전히 광자나 중력자, 암흑 에너지, 가상 입자 등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언어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 경계가 무 자르듯이 딱 생기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도 그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그 무언가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묘사했다.


일원성

소설 속 베아트리체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다. 데미안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는 주인공의 다른 두 개의 세계를 하나로 합치려 한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깨는 것도 아니고 멈추는 것도 아니다. 중용이지만 깊은 의지나 욕망이다.

그렇게 꼬마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되어간다. 하나로 붙이는 방법을 묘사해주지 않는다. 사실 그 두 개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본질

자기 자신의 신을 창조하는 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주인공은 자신의 본질의 찾아가는 성장을 하지만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작가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본질은 흔히 개성이라고도 설명된다. 이 본질과 성질은 바로 내가 느끼는 감정과 관련이 많다. 한 사건을 보고 슬프거나 기쁘다고 느끼는 것. 한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또는 미묘하다고 느끼는 것 보고 나의 본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감정이 나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생물학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20대의 나는 열정이 넘치지만 불안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런 성향은 바뀌어 중용을 찾기도 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나만 겪는 특별한 경험가 아니다. 한국에서 만의 상황도 아니다. 인류 보편적으로 나이 들면 바뀌는 성격이나 성향이 있다. 이런 성격도 나의 본질의 일부이고 이걸 운명이라 볼 수도 있다. 나의 호모 사피엔스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오이를 싫어하는 것이 개인의 취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 오이 냄새를 유독 잘 맡을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오이를 싫어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내가 우울하거나 민감하다면 과거 나의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이나 내 본질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만약 시간을 돌려 과거 태어나 곳으로 돌아가 내가 다시 태어난 난 다면 그 인간과 지금의 내가 성격이나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생물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이 또한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의 선택이 모여 나의 인생이 되고 인생은 하나의 흘러가는 무언가라고 느껴진다. 나의 인생은 사건과 사건들로 이루어진 사실적 정보의 집합으로 볼 수 있지만 내 본질은 그 사건들로 인한 나의 감정들이 축적되고 그 흐름이 변화하는 해류, 즉 구조적 시스템이라고 느껴진다.

한 사건을 보고 과거의 나는 슬프다고 느끼고 지금의 나는 신기하다고 느낀다고 보더라도 그 본질은 같다. 과거는 그렇게 느끼고 현재는 이렇게 느끼도록 구조적인 시스템이 내 본질인 것이다. 


본질을 회의적으로 보는 것만은 아니다.

바위를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내려오고 또다시 올려리는것을 반복해야 하는 형벌을 받는 시지프처럼 이런 환경을 죽음으로서 회피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희망을 가지는 것만이 나의 본질이 아니다. 반항하는 것도 돌을 굴려 오리는데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나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그러한 부나비가 자기의 의지를 별이나 또는 그밖에 어디에든지 집중시키려고 한다 해도 되지 않거든. 단지 그것들은 애당초 그런 노력 따윈 하지 않는단 말야. 그것들은 단지 자기들을 위하여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 필요로 하는 것, 절대로 가져야 하는 것만을 찾기 때문이지. 그리고 바로 그런 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는 거야. 그것들은 자기들 말고는 다른 어떤 짐승도 갖고 있지 않은 불가사의한 육감을 발전시키는 거란 말야! 우리

같은 사람은 분명히 짐승보다 더 많은 활동의 여지와 더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도 역시 비교적 협소한 범위 내에 제약을 받고 있어서 그 이상으로 나갈 수는 없는 거야."  <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구기성 옮김 > 중에서


<헤르만 헷세의 대답>

- 네

- 합일 시켰습니다

- 감정과 깨달음은 현실이자 이상이며 세속적이며 신적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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