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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Aug 30. 2022

대신 살아드립니다(7)

봉쇄령. 자유 박탈

이렇게 살면 망할 것 같은데 살아보고는 싶어!

저는 바로 그런 삶 살고 있습니다..

살짝 망한 것도 같지만 꽤나 잘살고 있습니다.


상황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크게 2가지의 일을 하곤 합니다. 하나는 확장하기 다른 하나는 관리하기입니다. 글쓰기도 비슷합니다. 넓게 사고를 확장하여 재밌고 흥미로운 글을 생산한 다음 관리의 과정으로 글을 좀 더 읽기 쉽고 조리 있게 수정합니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한 과정의 일입니다. 회사에서 영업이나, 판매, 기획 부서의 주 업무는 확장을 하는 일이고 인사, 회계, 총무부의 주 업무는 관리를 하는 일입니다. 저는 관리를 하러 하노이에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관리를 지루하게 느끼는 편입니다. 관리보다는 확장 그리고 창작을 좋아합니다. 30대 후반으로 갈수록, 직장 내공이 쌓일수록 관리적 능력도 조금은 발전했지만 그래도 저는 확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굳이 회사에서만 확장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취미 생활을 가지거나 다른 활동으로 나의 확장욕을 채우면 됩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문제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청년들도 1차 백신을 맞을 수 있는 시점이었지만 하노이 현지는 락다운이 걸렸습니다. Lockdown 해석하자면 봉쇄령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봉쇄령까지는 아녔습니다. 여러 활동이 제한되었지만 출퇴근이 가능했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필수 업무자로서 당국의 허가를 받고 나서야 할 수 있었고 회사 차로만 이동해야 했었습니다. 택시는 한참 전부터 이용이 불가능했습니다. 식당도 당연히 모두 문을 닫았고 간신히 마트나 식료품점에는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완전한 락다운이 시행되고 도시 곳곳에 검문소가 생겼으며 집 밖 이동이 완전히 제한되었습니다. 총을 메고 돌아다니는 군인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식료품이 없는 사람들은 당국에서 배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꼼짝없이 2달간 아파트에 갇히게 됩니다.

- 회사에서 주는 스트레스도 컸지만 코로나로 인한 자유의 박탈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여태껏 살면서 집에만 가만히 있어 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플 때만 병원에 입원해 봤지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했을 때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코로나로 인한 변화가 유독 힘들었습니다. 주말마다 산과 바다로 여행을 다녔고 그런 생활을 베트남에 있다고 덜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강제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세상이 던진 레몬에 맞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마지막남을 자유라도 놓지 않으려고 아파트 주변을 걸었습니다. 동물원에 갇힌 대형동물이 울타리 주위를 불안하게 서성이듯이 저도 아파트 주변을 반복해서 걸었습니다. 그 동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수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표출되어 걷는 게 아녔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걸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 걷고 견딜 수는 없었습니다

  

고민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코로나여서 그랬고, 그냥 회사 상황이 그랬던 건데 이것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해야 내 인생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도 결국은 다른 문제가 찾아올 건데, 지금 내린 해결책이 나중엔 지루한 결론일 텐데, 이런 원시적 관점이 나에게 와닿지 않았고 현실에 조급했습니다. 지금 바로 현생의 나는 세상에게 털리고 있는데 나중에 더 나은 선택 따위를 고려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 해외생활이 문제였을까요? 지금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찾다 보니 하노이로 나온 게 문제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트남에 거주하던 약 20만 명의 한국 교민 절반 이상은 한국으로 돌아간듯했습니다. 모세의 인도를 받아 이집트를 탈출하듯. 베트남 대탈출이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가야 하는데... 백신 1차도 못 맞았는데...

호찌민에 있을 때는 당연히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랜 해외생활을 마치고 결국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교민들도 좀처럼 볼 수 없었고 새로 넘어오신 한국분들을 소개받는 자리가 많았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테니스를 치고 맥주를 마시던 좋은 기억이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이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내 집 마련이 힘들지만 베트남에서는 수영장 딸린 고급 아파트에서 월세로 사는 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수년간 일하면 베트남에서 아파트 한 채는 마련할 정도였습니다(다시 한국으로 자산을 가져가기는 매우 힘듦). 테니스도 하고 여행도 많이 갈 수 있었지만 헛헛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지 공감이 되었습니다.

 - 어느 정도 경제적 자유가 생긴 이곳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이런 고생도 안 했겠지만 내가 인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게 무언지 고민해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결론

-내가 이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빨리 이직해서 내 살길을 찾아봐야 합니다.

- 힘들면 도망치는 게 상수입니다. 견디는 게 나를 더 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직을 위해 온라인으로 취업 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많았습니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한치앞 미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살아드립니다(8)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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