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의사의 예언대로 기억보다는 감각이 먼저 돌아왔다. 새끼손가락 끝의 세밀한 촉각, 코 뒤쪽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향과 맛, 고막과 피부에서 울리는 온갖 소리들이 점차 예리해졌다. 그리고 마치 짙은 운무가 서서히 걷히며 숨겨진 풍경을 드러내는 것처럼 기억의 파편들은 그 뒤를 더듬더듬 따라왔다.
그날 밤, 지혜는 홀로 창틀에 몸을 기댄 채 공허하게 바깥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어떤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딘가 친숙하면서도 포근한 체취. 그 은은한 향기와 더불어, 까마득한 얼굴 하나가 순간 뇌리를 스쳐갔다. 그 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그 기억이 자신의 것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사무치는 그리움이 넘칠 듯이 차올랐다.
지혜는 메모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필체로 '이름:이루미'라고 적혀 있었다. 언제, 왜 이 이름을 기록했는지 기억의 실마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글자들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가슴이 따스해지다가 갑자기 시리게 저며왔다
창 너머를 바라보니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식별할 수 없었지만 걸음의 리듬과 보폭이 낯익었다. 다시 침상에 몸을 뉘어 꿈속에서 실마리를 찾듯이 메모지를 가슴팍에 포갠 채 잠에 빠져들었다. 이 역행하는 세계에서 그 얼굴의 실체는 아직 의식 속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감정만은 선착해 있었다.
꿈속에서는 작은 아이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엄마!"
어린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모습 역시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윤곽과 실루엣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우리 딸, 어서 이리 와."
자신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은 느낌이 들었다.
내 딸인가. 그렇게 추정하면서도 확신에는 이르지 못했다. 충만한 포근함과 동시에 뾰족한 것에 찔린 듯 아린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글픈 뒷모습에서 장면이 느리게 흘렀다. 손을 뻗어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언제나 허공만을 헤맬 뿐이었다.
기억을 위해 가져온 상자 안에는 자신의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물건들은 낡아 빛바랜 화장품, 오래된 지갑, 별 모양 브로치들, 그리고 작은 모자 하나였다. 지혜는 그 모자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연분홍빛이었다. 세심하게 털실로 짜인 모자는 곳곳이 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감촉을 자아냈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였다. 한 코 한 코 뜨개질의 결을 더듬어 살펴보았다. 누군가에게 향한 간절한 애정이 실에 엮여있는 것 같은 작은 모자. 뜨던 사람의 설렘과 기대감이 실 한 올 한 올에 스며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썼던 것 같았다. 하지만 모자를 응시하고 있노라니 가슴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한 듯한 공허감. 나만을 위해 손수 만들어준 누군가를 잃은 슬픔인 것인가?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