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기억이 되살아났고요?" 정민준이 말했다.
"그래요, 엄마를 찾으러 가고 싶어요. 그런데 마음 한편은 불안해서... 만나면 안 되는 걸까요?."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신중하게 물었다.
"어머님과 마지막까지 원만한 관계셨나요?"
마지막의 시간이나 사건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따듯했다.
"기억하는 한 항상 자애로웠던 분이었어요."
"그렇다면 문제없을 것 같네요"
"가장 마지막으로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나는 게 아니라 어렸을 적 기억인데 역순으로 기억이 돌아오는 거 아니었나요?"
"네 신체는 그렇지만 뇌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억의 재생산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어릴 적 기억을 아주 많이 한 일이 가장 마지막으로 했던 일 일수도 있어요. 일반적으로 기억이 100% 돌아오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인간이 모든 걸 기억하며 살아가는 건 아니거든요. 다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를 만나시면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그날 밤 지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가지 마.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왜? 그 모든 따스했던 추억들이 있는데.'
'직감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어.'
'직감보다 감정의 기억이 더 확실하잖아.'
가슴 깊숙한 곳에서 계속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호두과자를 봤을 때와 동일한 종류의 거부감이었다. 몸이 먼저 각인하고 있는 무언가.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오리무중이었다. 지혜는 의지를 굳혔다. 이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이 존재하는데, 만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 불안감은 단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 뿐이라고 마을을 달랬다.
외출하기 전날 밤 꿈을 꾸었다.
젊은 여성과 아이가 보이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이거 예뻐요?"
별 모양 브로치를 들고 있었다. 상자에서 본 바로 그것이었다.
"응, 예쁘다."
자신의 음성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음성. 하지만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윤곽만 있을 뿐이었다. 안개 낀 유리창 너머처럼.
"엄마가 만든 건 다 예뻐요."
눈가가 촉촉해졌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다음날 낯설면서도 친숙한 그 동네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천문대가 자리한 산 중턱에 하얀 집들이 띄엄띄엄 박혀 있었다. 동네 수산시장에 들렀다. 빨간 대야에서 활발하게 헤엄치는 전어, 탄탄하게 살이 오른 도다리, 은빛으로 얼음 위에서 번들거리는 갈치들. 쌓여있는 건어물 더미 옆에서 문득, 복잡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머릿속을 격류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햇살의 향취, 손으로 만 저지는 염분 그리고 기억의 편린들. 몸이 각인하고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회색빛 거리들이 점차 익숙해 보였다. 작은 문방구, 비좁은 골목들, 자그마한 공원을 지나며 더 많은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이 골목을 질주하던 기억. 문방구에서 과자를 사 먹던 추억. 공원에서 엄마와 함께 산보하던 전경. 그리고 한 카페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 섰다.
'Cafe 별바라기'
고등학교 시절 엄마와 함께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엄마, 핫초콜릿 진짜 맛있어!"
"우리 지혜가 좋아하니까 자주 오자."
대학교 시절에도 찾았었다. 엄마와 함께 미래에 대해 열띠게 고민하던 곳이었다.
"도전해 봐. 엄마는 지혜 네가 나보다 더 뛰어나고 더 행복할 거라고 믿어."
결혼 전에도 이곳에서 엄마와 대화를 나눴던 추억이 있었다.
카페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벨 소리가 정겨웠다.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카운터 뒤 웅성거리는 대화소리에서도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심장이 '쿵' 하고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혜가 고개를 들자 숨이 정지했다.
엄마였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던 연로한 엄마가 아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청춘의 모습이었다.
"어머... 지혜야?"
엄마도 자신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반가움보다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 정말 엄마지?" 노인의 목소리로 지혜가 느리게 말했다
"지혜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엄마의 음성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농축되어 있었다.
"엄마, 나야. 지혜야. 그리워했어."
"그리워했다고?"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엄마, 정말 그리웠어. 그 모든 따스했던 추억들... 다 기억해."
지혜가 다가가려 하자 엄마는 한 걸음 뒤로 후퇴하며 말했다.
"왜?"
그 작은 움직임이 지혜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