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치 제방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듯, 기억들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의식 속으로 밀어닥쳤다. 잠들어 있던 감정의 잔해들은 소용돌이치며 일어나, 지혜의 내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엄마의 홀로서기가 만들어낸 상처였을까, 아니면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된 균열이었을까. 우주는 이미경의 모성과 지혜가 바라는 따스함을 다른 궤도에 배치해 버렸다. 태초의 궤도를 벗어나 표류하기 시작한 천체들처럼, 두 존재 사이의 간격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대치는 언제나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딸이 자신보다 더욱 찬란하고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지혜의 성적이 하락할 때면 이미경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실망감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렸다. 실패에 대한 공포가 뿌리 깊은 강박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독립적인 성향이라고 이미경은 오직 긍정적인면으로만 바라보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은 후 지혜는 마침내 휴직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조심스럽게 상황을 털어놓자 이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할 순간이야. 절대 포기하면 안 돼." 지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한 마디였다. 고향이라는 안식처로 도피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지혜는 마치 급류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결혼이라는 선택지로 떠밀렸다.
그 후로 저 먼 우주 저편, 하나의 별을 중심축으로 삼아 이 둘은 각기 다른 좌표에서 서로 다른 속력으로 공전하며 움직였다. 먹구름이 드리워져 하늘이 잿빛으로 흐려지거나,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에도, 이 광활한 희미한 별빛을 보냈다.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엄마의 얼굴은 만개한 벚꽃처럼 환하게 빛났다. 지혜는 이 작은 생명을 통해 엄마와의 단절된 끈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여자 둘만의 세월을 보내다 각자의 길로 나뉜 후 더욱 깊어진 적막감 속에서 이들의 마음은 설렘으로 부풀어 올랐다.
"우리 손자 정말 예쁠 거야. 지혜 닮아서 말이야."
"엄마, 아직 겨우 6주밖에 되지 않았어요."
지혜 역시 아이를 떠올릴 때면 어디선가 은은한 바람이 불어와 영혼 깊숙한 곳에서 마음이 춤을 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손끝에서는 약한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간지러움이, 가슴속에서는 북소리처럼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울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달콤하고 황홀한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초봄의 문턱에서 아직 차가운 새벽 공기가 스며들어 오는 아침, 엄마와 함께 아기용품을 구하러 나섰다. 그 연분홍색 털모자는 그때 엄마가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떠준 선물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모자. 고요한 오후 햇살이 창가로 스며드는 자리에서 털실을 조심스럽게 감고 뜨개바늘을 섬세하게 움직였다.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이를 위해 지혜의 어머니는 마치 기도하듯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털모자를 완성했다. 그 염원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엄마와 딸을 다시 하나로 이어주었다. 연분홍색은 생명의 여린 숨결과 봄날의 미소를 닮은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엄마는 손녀에게, 이 거친 세상이 모질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한 가닥 한 가닥을 엮어 올릴 미래의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이 털모자를 쓰고 세상의 첫 바람을 맞이할 딸의 얼굴, 그녀를 처음 품에 안아보는 날의 전율, 그리고 그녀가 자라나 이 모자를 발견하며 "이건 누가 만든 거예요?"라고 천진하게 물어볼 그 순간까지. 그 질문을 듣는 날이 온다면, 지혜는 눈물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것이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널 사랑했던 사람이 만들었단다."
호두과자는 임신 기간 동안 지혜가 유독 즐겨 찾던 간식이었다. 그녀에게는 계절의 정취와 삶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 쌀쌀한 바람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걸어갈 때, 길모퉁이에서 피어오르는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에 절로 발걸음이 멈춰 서곤 했다. 겉은 바삭하게 구워지고 속은 달콤하게 채워진 그 절묘한 조화는, 마치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궤적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무심한 바람과 냉혹한 현실에 시달려야 할 순간들이 찾아온다. 마치 호두의 단단하고 거친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고 메마른 시간들. 그러나 그 속에는 언제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숨어 있다. 팥의 부드러운 감촉, 호두의 고소한 풍미, 입안 가득 퍼지는 따뜻하고 달콤한 여운은 그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달콤함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니라, 깊숙한 속에 조용히 간직된 것이다. 호두과자는 그 견고한 껍질을 조롱이라도 하듯 바삭하고 부서지기 쉬운 과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