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고 그래서 알아가는 것이다.”
알아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목욕탕은 나에게 사랑의 공간이 될 수 있겠다.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항상 바빴고 아들을 더 좋아했고 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무뚝뚝한 엄마였다. “심 XX!” 엄마는 항상 성을 붙여서 내 이름을 불렀다. 친구의 엄마들이 “우리 딸 은희야” “우리 딸 윤아“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몹시 부러웠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엄마에게 달려간 적이 있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남동생의 8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의 100점짜리 시험지는 동생의 80점짜리 시험지 다음이었다. 그 모습이 서운해서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한편, 나는 엄마의 무관심에 대한 서운함으로 할머니 편을 들곤 했다. 엄마의 시집살이 짐을 더 무겁게 한 셈이다. 사실 엄마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엄마로부터 관심을 끌고 싶은 마음으로 무작정 할머니를 따라한 것이었다.
엄마는 ‘엄마와 같은 엄마’ 밑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도 아들을 딸들보다 더 귀하게 키웠고 평소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엄마 또한 나처럼 외할머니에게서 다정하게 이름을 불려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결국 엄마의 성격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셈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딸에 대한 사랑의 표현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어린 내가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선택한 잘못된 표현방법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외가 하나 있었다. 바로 목욕탕에서다. 항상 엄마에게 뒷전이었던 나는 남동생이 없는 그곳에서 만큼은 엄마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따뜻한 물속에서 살을 맞대고 앉아 나긋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미주알고주알 질문을 던지면 엄마는 온전히 나를 향해 진솔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진짜 엄마를 알아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렇게 목욕탕에서 엄마를 알아가며 나는 엄마의 진정한 딸이 되어 갔다. 늘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문다. 여자로서의 엄마, 누나로서의 엄마, 직장인으로서의 엄마, 다양한 모습의 엄마를 알아가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엄마와 딸이 아니라 고민을 나누고 해결하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한다.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와 동생을 위해 살아온 엄마의 인생을 듣고 있자면 표현하지 않는다고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내 무지함에 부끄러워 뜨거운 물에 얼굴까지 담근다.
대학에 들어간 후로 엄마의 곁을 떠나 살고 있는 지금, 문득문득 엄마와 함께하는 목욕탕이 그립다. 엄마의 사랑과 애틋함이 더욱더 간절해지는 타향살이다. 이번 주에는 꼭 집에 내려가 그동안 못 나누었던 엄마의 생활을 나누고 싶다. 더 알아가고 싶은, 더 사랑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