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를 읽고
산티아고의 배는 낡았고 그는 여든 셋의 노장이지만, 늘 큰 물고기를 잡겠다고 떵떵거린다. 하지만 그는 항상 바다에 나가서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날 산티아고는 그의 다짐처럼 아주 큰 물고리를 3일간의 혈투 끝에 잡고야 만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만난 상어 떼에게 잡은 물고기의 살점을 다 뜯긴다. 노인은 결국 커다란 가시만 남겨 돌아온다.
뼈만 남겨 되돌아온 노인.
아무것도 없이 돌아왔던 그 걸음이 나의 특수교육 같아서 읽을 때마다 코끝이 시큰시큰하다. 흔히들 특수교사를 제자가 없는 교사라고 한다. 가르치는 아이들의 지적능력 탓에 나를 기억하고 되찾아 오는 학생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나의 바다에서 늘 빈손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느리게 자라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무언가 손에 들고오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나의 특수교육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돌아보았다. 그 답은 '산티아고는 정말 빈손으로 돌아왔나?'라는 물음에 있었다. 올해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전혀 다른 책 처럼 느껴졌다. 그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상어 떼와 치열하게 싸웠던 흔적을 배에 남겨 돌아왔다. 그의 배에는 커다란 물고기 가시가 매달려 있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매일 바다로 나갔던 성실함과 직업의식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물고기를 포기하지 않는 노장의 우직함으로 실현된다. 가시만 봐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얼마나 큰 물고기를 잡았었는지 말이다.
올해 10년차 특수교사가 되었다. 나는 잘 가르치는 것에 자주 실패한다. 잘 준비했다고 자부했던 수업에서조차도 말이다. 매일의 수업에 대한 고민들은 남들 보기엔 우스운 것들이지만, 나는 늘 한 시간의 수업이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종종거렸다.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기술도 포함한다. 일상생활기술이란, 말 그대로 살아가며 스스로 식사하고 등하교를 하는 것 처럼 누군가에겐 그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배우지 못하면 삶의 질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처럼 중요한 일상생활 기술은 비장애인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라서, 아무리 애써 교육해도 보육으로 오해받아왔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이, 내 손에 남겨진 성과가 남들이 보기에 커다란 물고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초라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나. 내가 치열하게 살아 낸 하루조차 고작 가시일 뿐이라며 자조하지는 않았나. 하지만 조당은 늘 빈손이어도 자신의 직업에 당당하고 자부심이 넘쳤다. 그는 무엇 하나 잡지 못했을 때조차도 늘 떵떵거리며 바다로 나갔다. 나의 바다에서 나는 얼마나 자부심없이 살아왔는지 돌아보았다.
3일간 물고기와 홀로 싸운다는 건 얼마나 외롭고 지치는 일이었을까? 주변에 도울 이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노인은 얼마나 포기하고 싶었을까? 그 모든 순간을 견디고 끝내 물고기를 잡은 그의 직업적 태도와 집념에 전율이 흘렀다.
제자가 돌아오든 안 돌아오든 나는 내일도 학교로 향한다. 아이들은 느리지만 분명히 배운다. 그곳은 나의 바다이다. 빈손이어도 모두가 비웃어도 매일 당당하게 바다로 나가는 노인처럼, 바다에 자신의 삶을 걸었던 그 노인처럼. 장애 학생이 커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나는 초라해질 이유가 없다. 남들이 보기엔 대학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나는 것도 아닌 특수교육이지만 그 바다에서 나는 정말 치열했으므로. 자주 실패해도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고민했다면, 아이들이 느리지만 무언가 배웠다면 이제는 스스로 당당해져야 할 때이다.
산티아고와 마놀린이 즐겨 이야기하던 야구처럼 우리는 언젠가 인생의 1루와 2루, 3루를 거쳐 홈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를 돌아 홈으로 돌아온 선수를 빈손이라고 누구도 욕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누를 잘 돌아 홈으로 돌아오면 누구나 환영받을 만하다.
주어진 위치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낸 그 하루를 반짝이는 성과가 없다고 자책하지는 않았나.
그저 맡겨진 하루와 주어진 '업' 앞에 '~답게'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지긋지긋한 자책의 터널을 지나서 글을 써보기로 다짐했다.
이 자리가 내가 다시 자책의 터널을 건너려 할 때 나의 자존감을 지켜줄 곳이 되길 바란다.
애써 살아온 그 생에서 배에 가시만 남겨 돌아왔을지라도 하루를 성실히 잘 살았다고 나를 다독일수 있기를, 내가 바다에서 돌아오길 기다려줄, 나를 위해 울어줄 단 한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밤.
모두가 반짝이는 성과를 말하지만, 매일의 성실함에 방점을 찍고 싶은 밤.
나는 내일도 나의 바다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