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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장하트 Jul 25. 2024

어정쩡한 엄마

직장맘도 어중간, 전업맘도 어중간


스물아홉이 되던 해, 우리 부부는 1월에 결혼식을 하고 10월에 아이(아들)를 낳았다.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와 계획도 없이 무작정 결혼을 결정했다.

철부지 어린 시절이라 사랑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 동갑내기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은 결혼하던 해, 대학원을 졸업했고 바로 회사에 입사한 새파란 신입사원이었다.

양가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오롯이 둘이서 그 모든 과정을 해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픈 과거였다.


'애들이 뭘 알고, 애를 키웠을까?'

20년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그냥 '어른 역할놀이'였다.

그때 우리는 꽤나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다.

애들이 싸우면서 큰다고, 우리 부부는 정말 많이도 싸웠다.

부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 육아와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결국엔,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아이를 잘 키워내고 싶은 욕심만 앞선 애들이었다.


백일도 안된 아가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출근하면서, 나는 늘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아이에게 드는 미안함과 죄책감..

베이비시터에게 아가를 맡기는 불안감..

도와주지 않는 양가 부모님들에게 드는 서운함..

이렇게 준비 없이 덜컥 결혼한 나 자신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가장 컸다.


그때는 그랬다.

조금만 성숙된 어른이었다면, 나의 상황과 위치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우리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의 환경도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 그걸 몰랐던 우리는 쉬는 날이면, 미친 듯이 아이에게 몸이 부서져라 정성을 퍼부었다.

가끔씩 그때 사진을 보면, 우리 부부는 둘 다 다크서클로 뒤덮인 얼굴이고 몸은 XXS 사이즈다.

아무리 심신이 피곤해도,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그게 맞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은 부모'라고 생각했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맹모도 아니면서, 좋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찾아 이사를 했고, 정서적으로 조금만 불안정해 보여도 혹시 일하는 엄마 때문에 애착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설레발치며 아동심리상담소도 들락거렸다.

아이가 기차를 좋아할 때는 하루종일 서울역에 앉아서 기차를 보여줬고, 어느 주말은 2호선 순환선을 타면서 종일 돌고 돌았다.

비행기를 좋아할 때는 공항에 가서 비행기 이륙과 착륙을 보여주며, 2~3일 여유가 생기는 휴일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여행을 갔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부모역할이 뭔지 몰라서, 아이가 반응하는 대로 움직인 것 같다.

물론,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부모 역할이 뭔지 배우지 못했고, 몰랐다. 우리 부모들이 해주지 않은 걸 해주는 게 부모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부족한 부분들이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것들 때문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주었다. 크게 아프거나, 다치지 않았고 어딜 가도 예쁨을 받는 아이로 자라주었다.


좀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 여러 상황과 고비들을 넘기면서 버티던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퇴사를 결심했다. 직장맘에서 전업맘으로 나의 모드는 전환되었다. 갑자기 많은 시간들이 생겼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매년 학급임원이 되어, 나에게 반장엄마라는 명함과 역할을 붙여주었다.

아이의 학교일로 엄마들을 만나면서 보내는 시간들이, 아이를 위해 쓰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취미활동이었다. 어쩌면 직장맘을 하면서 그동안 아이에게 쓰지 못한 시간들을 메꾸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왜 엄마는, 누구의 엄마로 살아? 나는 그게 안타까워. 엄마의 이름으로 살아"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말했다.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순간 아이가 미웠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너 때문에 엄마가 일도 그만둔 거잖아. 엄마 계속 일했으면, 지금 팀장은 됐을 건데!!"

"엄마, 그때 몇 살이었어? 서른여섯 살 아니었어? 서른여섯 살 성인이 결정한 일에, 왜 자꾸 일곱 살이었던 나랑 책임을 나누고 싶어 해?"

아이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 내 인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 인생에 나는 없었다. 그걸 아이가 알려주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날부터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아이가 스물한 살이 되었다.

세상에 스물한 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부모는 세상에 많지 않다.

더 이상 아이는 기차와 비행기, 레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맛있는 간식을 챙기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어줄 엄마도, 학원을 보내줄 엄마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스물한 살이 된 아이는 나보다 아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훨씬 더 많아졌다.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모르는 게 없던 슈퍼맨과 슈퍼우먼 같던 아빠와 엄마가 변했다고 느껴질지 모르겠다.

키오스크에서 버벅거리며 주문을 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 거다.


나의 방황은 3년째 진행 중이다.

경력단절 여성이다. 하던 일을 다시 하기에도, 아르바이를 하기에도 나의 나이는 매우 어정쩡하다.

마냥 전업맘으로 있기에도 어정쩡하다.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 나갔으니, 하루종일 남는 건 시간이다.

12년 동안 '나의 시간'은 공백이 되었다. 가장 아름다웠을 30대와 40대가 사라졌다.

조금 아쉽고 가끔은 슬프다.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어정쩡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이 어중간한 현재의 내 시간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40대 후반의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를 지금부터라도 사랑해야만 한다.

가끔씩 엄마밥을 찾는, 어정쩡한 엄마의 역할을 조금은 남겨준 아들에게도 감사하다.


세상의 엄마들에게,

우리는 매번 최선을 다한 거라는 거 잊지 말기요.

직장맘이든, 전업맘이든..

아이를 위해서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열심이었다는 거 잊지 말기요.



남이섬에서 아들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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