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끝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놓은 구절인데, 무슨 책이었는지 모르겠다.
근래 나의 상태인 것 같다. '불안'한 건 맞는데, 정확히 무엇이 두려워서 불안한 것인지 모르겠다.
공황장애로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몇 번 극강의 두려움에 휩싸인 경험이 있다.
간간히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정맥이 심할 때만, 가끔 먹는 안정제는 있다.
초행길이라 평소 다니지 않던 도로였고, 나는 내비게이션의 음성에 따라 운전을 했다.
그리고, 어느 지하터널에서 갑작스럽게도 낯선 나를 발견했다.
유난히 천장이 낮고, 어둡고, 도로의 폭이 좁은 어느 간선도로에 있는 터널이었다.
퇴근 시간쯤이었는데,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나는 그 터널의 끝을 예상할 수 없었다.
유턴을 할 수도, 빠질 수도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공황장애 증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코로 흡기를 하고, 입으로 길게 호기를 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 터널의 끝은 분명히 있어. 터널이 길지 않은데, 도로가 막히는 것뿐이야'
하지만 점점 더 답답했고, 조절할 수 없는 무언가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바짝 옆에 세우고 119를 부르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119 구조차량도 진입할 수 없어 보였다.
'차를 세우고 옆에 비상구를 통해서 나가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동이라 내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남편한테 전화를 걸려다가,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남편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인데, 회사에 있을 사람한테 걱정만 하게 할 것 같아 그 또한 민폐였다.
지금 이 상황에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외로웠다.
연락처를 검색하고, 친한지 않은 아이의 친구 엄마가 눈에 띄었다.
블루투스로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에요? 언니!!" 반갑게 받아주었다.
"그냥, 잘 지내? 요즘 통 연락을 못했다"
다행히도 그 동생은 혼자서 요즘 보는 드라마 얘기를 떠들며, 나를 환기시켜 주었다.
드라마 시작부터 결론까지 얘기하는 사이에 4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차는 앞으로 전진했고, 희미하게 외부의 빛이 들어오는 터널의 출구가 보였다.
'하....'
터널을 나와 나는 숨을 토했다.
'아... 이런 게 공황이겠구나'
비슷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20대 후반쯤, 허리 통증으로 MRI 촬영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머리부터 어깨 정도 들어갔을 때쯤, 나는 발버둥을 치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폐소공포증 있으세요? 오늘은 촬영을 못하겠네요. 다음에 수면으로 하셔야겠네요"
'아.. 맞다. 그때도 그랬구나.'
내가 모든 터널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운전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다녀봤던 길에 있는 터널들에서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속초를 갈 때 지나는 고속도로의 긴 터널에서도 나는 두려움을 느낄 수 없다.
끝이 어딘지 알고 있는 터널은 전혀 상관이 없다.
마치 내 인생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생각해 보면 특별히 대단한 일도 없이, 한 단락씩 잘 지나간 것 같은데, 결론이 확실하지 않은 사건들과 마주치면 그 일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신경을 쓰던, 쓰지 않던 결국에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고 말이다. 효율적이지 못한 감정들과 싸움을 하고 살고 있다니.... 그것도, 나 자신과의 감정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아직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것들을 해소하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
어제저녁,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재작년부터 갑자기 비행기를 타는 게 너무 두려워졌다고 했다.
심지어 나와 비슷하게, 비행기 문이 닫힐 때면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조여온다고 표현했다.
여행을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갑자기 생겼어? 어느 날?"
"응... 2년 전인가, 이륙 방송이 나오면서 문이 닫히는데 갑자기 갇혔다는 두려움에 미칠 것 같았어.
와인을 벌컥벌컥 먹고 자버렸잖아"
친구는 그 이후로, 일본 외에는 여행을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2시간이 넘는 비행은 자신이 없다 했다.
그것도 안정제를 먹고, 더 챙기고, 비행기를 타서는 와인 서비스만 기다린다고 했다.
"미안한데, 나 웃어도 돼? ㅎㅎㅎㅎㅎ"
"야, 왜 웃어. 나는 유럽을 죽기 전에 가보겠냐고!!"
"네가 웃겨서 웃는 게 아니야.
비행기는 탈 수 있는데... 2시간밖에 못 타는 너나,
운전은 좋아하면서 터널은 무서워하는 나나, 우리 왜 이렇게 어정쩡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설마, 계속 이렇게 살기야 하겠니"
나와 내 친구는, 우리 인생에서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진 걸까..
그것도 어정쩡한 두려움.
완전히 아는 것도, 완전히 모르는 것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