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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기의 계절

이발기의 고수가 되는 그날까지!!

by su

나는 독일에 와서 작년에 처음 이발기를 만진 이후에 남편의 머리는 가위로 계속 다듬었었다. 독일은 미용 가격이 제법 비싸기 때문에 자주 가서 자르면 비용도 만만치 않고 남편의 경우 앞머리나 옆머리는 본인이 잘 다듬을 수 있기 때문에 뒷머리만 잘라주면 되었다. 나는 남편이 못 자르는 뒷머리와 옆라인을 잡는 걸 도와줬었다. 미용사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위로 잘 다듬었다.

나는 인터넷 영상으로 열심히 이발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봐도 혹여나 회사를 가야 하는 남편 머리를 밀어버릴까 아주 소심하게 뒷머리를 자주 다듬어 주고 귀 옆도 자주 라인을 잡아주었다. 이젠 남편의 귀 옆라인을 잡아주는 건 제법 잘하게 되었다.

가위로 남편의 머리를 자를 때마다 이발기를 사용하면 좋겠다 생각은 했지만 그동안은 그렇게 덥지 않아 이발기 도전은 하지 않고 남편의 뒷머리를 조금씩 계속 잘랐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데 맨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데 남편의 뒷 머리가 보였다. 남편의 뒷머리를 보며 나는 이발기를 들어야 할 때가 된 거 같았다. 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남편의 머리가 가라앉고 지저분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요즘 독일어 학원에 가면 시원하게 머리를 자른 외국인 남자 친구들의 뒷머리만 보인다. 내 마음속에 남편의 뒷 머리를 이발기로 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던 거 같다.



오늘 아침 남편이 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고 와서 아침식사를 하길래 왜 머리를 안 말렸냐고 물어보니 남편이 오늘 아침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 드디어 오늘 내가 이발기를 들어야 하나 싶었다. 남편의 뒷머리를 보고도 더 이상 이발기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오늘은 내가 이발기로 뒷머리를 시원하게 밀어주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 '좋아요'를 누른 남자 머리 망하지 않게 자르는 방법의 영상들을 보며 이발기를 올리는 손목 스냅을 연습했다. 연습만 하면 뭐하겠나 싶겠지만 혹여나 잘못 밀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연습은 필수다.

남편은 나에게 머리가 실패하면 미용실을 가면 된다며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사실 내 성격에 그게 안 된다. 우선 자신 있게 남자 머리 옆라인을 잘 잡았다. 나 스스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옆라인 잡는 것도 나는 고수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 라인을 맞춰가며 천천히 자른다. 남자의 머리 옆라인은 생명이다.

옆라인을 완성하고 나서 나는 뒷 머리를 이발기 9mm로 밀기 시작했다. 남편도 사실 좀 불안했는지 라인을 빗으로 딱 잡고 밑에서 올라오라고 계속 이야기를 해줬다. 목소리가 다급해 보였다.

나는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9mm로 머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것처럼 팍팍 머리카락이 잘려나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9mm로 머리를 처내고 나니 나도 속이 조금 시원했다. 옆라인도 9mm 이발기로 하고 밀고 가위로 다듬으니 제법 머리스타일이 나왔다.

그 후 6mm로 밀기 시작했다. 6mm는 9mm보다 더 잘 나갔다. 좀만 잘못 밀면 계속 올라갈 거 같아 여기까지 하겠다고 하고 살짝살짝 밀어주었다. 그리고 아래 머리는 3mm로 밀었다. 미용사처럼은 아니지만 아주 깔끔한 남편의 머리가 완성되었다. 잘려나간 남편 머리카락을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해졌다.

남편이 목 뒤가 이렇게 깔끔하게 잘리니 너무 시원하다며 만족해했다.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아이들도 엄마 머리 잘 잘랐다고 칭찬해주었다.

나는 이발기 사용과 가위 사용을 비교해보니 이발기 사용이 남자의 뒷머리의 깔끔함에 있어 완전한 압승이었다. 남편의 뒷머리를 자르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이발기를 사용해야겠다는 사명감까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이발기. 이젠 이발기와 친해져야겠다.

독일에 와서 새롭게 도전해보는 것들이 하나씩 생기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있다. 실패를 경험해보기도 하고 그 실패를 경험으로 성공도 해보고 있다.

그동안 독일에 와서 요리도 계속 도전해서 많은 성장이 있었듯이 이발기와 친해져서 남편 머리 자르는 데 고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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