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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시가 되고 싶었어?"

by 성소영

남편과 나는 대학교 시 창작 소학회에서 처음 만났다. 언어영역을 공부할 때가 아니고는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던 새내기 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들어간 소학회에서 지금의 운명이 시작된 셈이다. 남편은 국문과 1년 선배였고 좀 어리숙해 보였다. 가방도 없이 털레털레 강의실로 들어와 카고바지의 불룩한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는 그를 보고 ‘저렇게 대충 사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활은 기대했던 것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수업은 어려웠고 관계는 불편했다. 어른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선배들과 그것을 익숙한 척 따르는 동기들 사이에서 섞이지 못하고 부유했던 것 같다. 낯설고 시시한 캠퍼스에서 그는 흥미로운 존재였다. 봉사활동을 가느라 주말 술자리에는 나오지 못하고,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을 듣다가 밤을 지새워 1교시 수업은 꼭 지각을 하는 사람. 남학우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음란한 농담을 할 때 “나 그런 얘기 싫어해”라며 자리를 피하던 유일한 남자 선배. 그는 대충 사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삶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현실적인 나와 달리 남편에게는 이상적인 구석이 있었다. 나는 무난한 회사에 취직해 평범하게 살고 싶었고, 남편은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구체적인 노력도 많이 했다. 그의 핸드폰 메모장을 열면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둔 메모 파일이 쏟아졌다. 언제라도 시를 쓸 수 있도록 외출할 때는 항상 주머니에 작은 수첩과 펜을 챙겼다. 순천으로 여행을 가던 날, 달리는 기차 안에서 기어코 시 한편을 완성하는 그를 보면서 이 사람은 정말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꾸준히 시 수업을 들었다. 마음을 다해 쓴 시를 고르고 골라 매년 신춘문예에도 응모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시인은 되지 못했다. 대신 시를 아주 좋아하는 아빠가 되었다. 아이가 두 돌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당시 꽃에 푹 빠져있던 아이는 예쁜 사물을 볼 때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꽃!”이라고 외치곤 했다. 하루는 책에 그려진 별 그림을 보며 아이가 “꽃! 꽃!”이라고 말했다. 이건 꽃이 아니라 별이야, 하고 정정을 하려는데 불쑥 남편이 나타났다.


“그래 맞아. 별은 하늘에 핀 꽃이지. 제이는 시인이구나.”


남편의 마음 안에 여전히 시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 수 있었다. 이후로도 그는 아이에게 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엄마와 아빠는 시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만났고, 아빠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그와 연애를 하면서 덩달아 시를 좋아하게 된 나도 이따금 시집을 꺼내와 아이에게 읽어주곤 했다. 그림책만 볼 때는 육아가 따분하고 답답했는데 시를 읽으면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육아에도 낭만이 있다고 느껴졌다. 아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저멀리 달아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아이가 먼저 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섯 살이 되었을 때다. 서툴게나마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자 시에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한번도 그러라고 한 적은 없는데, 혼자서 시를 썼다며 읽어주기도 했다. ‘비가 와요/ 어서 와요/ 우산은 빼먹지 말고요/ 내 우산 토끼우산‘ 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동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흐른 어느 날,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아이가 말했다. “아빠는 시가 되고 싶었어?” 예고도 없이 들어온 깜짝 질문에 운전을 하던 남편은 머뭇머뭇했다. “시가 뭔데?” 내가 묻자 아이가 답했다. “시는 짧은 글이잖아. 짧은데 좋은 이야기. 좋은데 짧게 읽는 글자가 되고 싶었던 거야?” 아빠는 왜 사람이 아니라 글자가 되고 싶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이의 깜찍한 오해에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시인이 되고 싶었어.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하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왜 시인이 안 됐어?”

“안 된 게 아니라 못 된 거야.”

“그래? 다시 하면 되잖아!”


다시 하면 된다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간단한 일을 왜 어렵게 생각하냐고 말하는 것 같다. 맞다. 다시하면 된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 부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낮에는 작은 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밤에는 시를 배우러 다니던 남편은 내가 출산을 한 뒤 증권사에 취직했다. 아빠가 되려면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결코 쳐다보지 않았을 길, 오직 가족의 생계만 고려한 선택이었다. 업무적인 부담에 육아까지 더해졌으니 시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시에서 점점 멀어졌다.


남편은 매일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선다. 증시가 열리기 전, 사무실에 도착해 업무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내가 곤히 잠든 시간에 혼자서 새까만 현관문을 밀고 나가는 그의 등을 생각하면 좀 슬프다. 무용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던 사람이 실용적이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세상으로 매일 걸어들어간다. 그가 이 일에서 어떠한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알지만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괜찮지 않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시를 쓰겠다는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간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그 사이 아이는 일곱 살이 되었고, 그는 한 차례 승진을 했다. 자기가 맡은 프로젝트의 성과를 자랑하고, 더 잘하고 싶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시인을 꿈꾸던 시절의 그는 온데간데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올해 업무량을 더 늘리려고 해. 아이가 많이 컸고, 학원도 다니니까 그 시간에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당신은 올해를 어떻게 보내고 싶어?”

새해를 맞이하며 던진 나의 물음에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피아노를 배워볼까? 요즘들어 자꾸 쓸모 없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반가워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모양이 변했을 뿐, 내가 스무살 때 반한 남자는 사실 그대로 있다. 성취욕이 강했던 내가 아이를 낳고 삶의 여러 목표를 체념했듯이, 그에게도 접어둔 바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캠퍼스에서 무수한 꿈을 나누던 우리는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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