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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떡꼬삐와 키즈파케

by 성소영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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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고나서 생긴 취미가 있다. 아이의 말을 수집하는 것이다. 아이가 드문드문 단어를 말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 메모 앱을 켜고 그 말을 받아적었다. 처음에는 발음하기 편한대로 자음을 뒤바꿔서 말하는 게 귀여웠다. 떡볶이는 ‘떡꼬삐’, 키즈카페는 ‘키즈파케’라고 말하는 식이었는데, 귀여움의 최고봉은 바로 ‘퐁차(홍차)’였다.


문장을 말하면서 수집한 말들은 재미있고 신기했다. 올바른 용례는 아닌데 논리적으로는 알맞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반짝친구’처럼. 언젠가 어린이집 하원길에 집 근처 숲을 걸으며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엄마, 어준이랑 나는 반짝친구야!”

“반짝친구? 왜? 둘 다 반짝이게 예뻐서?”

“아니! 어린이집에서 우리 둘이 제일 친하니까 반짝친구지.”


둘이 노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께서 “너희는 단짝친구구나”라고 하신 말씀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단짝친구건 반짝친구건 아이 말이 맞다. 태어나 처음 사귄 친구는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가? 어쩌면 생애 최초의 벗에게는 ‘짝이 맞는다’는 뜻의 단짝보다 반짝인다는 의미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이가 ‘반짝’과 ‘친구’의 결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일 테다.


화장실에서 나와 응기양양한 표정으로 “엄마! 나 똥 세 송이 쌌어”라고 말하거나, 자동차 네비게이션의 안내 말투를 진지하게 따라하며 “여기는 보행자 사고 당할(다발) 구간입니다”라고 했을 때는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듣자마자 내 배가 다 시원하고, 양 옆을 힘주어 살피면서 조심히 건너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루는 거실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엄마 나 급해! 급해! 빨리 와.” 화장실이 급한가 싶어서 설거지하던 손의 물기를 아랫바지에 쓱쓱 닦으며 거실로 향했다. “왜? 응가 마려워? 얼른 화장실 가자.” 재촉하는 나를 보고 아이가 양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니… 엄마랑 안는 게 급해…”

세상에 이보다 더 로맨틱한 요청이 있을까?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면서 작은 인간과 함께 사는 기쁨에 대해 생각했다.


장 자크 루소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욕구가 아니라 정념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배가 고플 때는 눈앞의 사과를 따먹으면 되지만 사랑과 분노, 연민, 사유 등은 행동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탓에 언어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를 키워보면 그의 주장이 실감난다. 아이는 머리 끝까지 차오른 감정을 전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 온갖 짜증을 내고 안간힘을 쓰다가 마침내 말이 트였다. “시러, 안 해, 미워, 따랑해, 아기 화나써!!!”


아이의 말이 나의 글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육아를 하면서는 글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은 커녕 조용히 밥을 먹는 것조차 어려운 엄마의 삶은 마치 나를 지우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책 한 줄 읽지 못하는 하루가 늘어갈수록,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서 바깥으로 점점 밀려나 홀로 난간 앞에 선 듯 외로웠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육아는 일방향의 희생이 아니라 상호 돌봄에 가깝다. 아이가 주는 편견없는 사랑, 순수한 마음, 때 묻지 않는 날 것에서 나오는 생동감을 지척에서 보면서 나는 전보다 훨씬 더 숙성된 인간으로 자랄 수 있었다.


<모든 아름다움은 이미 때 묻은 것>에서 작가 레슬리 제이미슨은 자신의 글쓰기 수업에 온 학생이 ‘어머니로 사는 것은 너무 따분해서 글로 쓸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고 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이상, 세상에 따분한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이번 연재에서는 딸아이가 말을 시작한 두돌 이후부터 일곱살이 된 지금까지 수집한 말들, 그로부터 피어난 생각들을 적으려 한다. 내가 그 말을 메모장에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필이면 그 말이 마음에 꽂혔을까? 한동안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아이들은 욕망과 감정을 자기가 아는 얼마간의 언어로 표현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낸다. 불순물 없는 시선, 솔직함은 어린이의 자질이다. 그래서일까, 아이의 말을 들으면 잊고 살았던 본질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모든 아이들의 언어가 책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아이의 말을 받아적을 때마다 좋은 문장에 밑줄 긋는 마음이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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