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Day 62]
"오랜만이네 아들"
"에이 뭘 오랜만이야, 헬싱키에서 전화했자나요."
"아아 그랬었지 참. 밥은 잘 먹고 다니고?"
"그럼요, 여기 음식 다 맛있어요."
"너무 돈 아낀다고 그러지 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래."
"응 알겠어. 아,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하하하하 참 빨리도 전화한다!"
"아냐 나 방금 일어나자마자 전화한거에요."
"아 그랬구나 거긴 시간이 다르지, 맞네. 아직 헬싱키였나?"
"아뇨 나 에스토니아에요. 넘어온지가 언젠데."
"그랬구나. 아빠가 아들한테 관심이 없었다, 미안. 아무튼 고마워. 안 잊고 이렇게 전화해줘서."
"에이 무슨. 아니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고 고마워라. 응 너도 많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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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도 부모님을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막연하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어머니 아버지로 호칭을 바꾸게 된다고 믿었다.
요새 점점 "너는 아직 어리잖아."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그만큼 어느정도는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어머니보다는 엄마가, 아버지보다는 아빠가 더 좋다.
이제는 이러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기대고 싶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산이자 바다를 아직 내 손 안에 쥐고 싶다는 나쁜 마음때문일까.
분명 옛날 같지 않다. 주름살과 흰 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눈빛도 조금씩 서글퍼지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다분히 녹아들었음이 눈 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나는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다.
혼자 해외에 나와서 문득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꽤 젊고 총기가 가득한 남녀 한쌍이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마주할 사람은 그보다는 조금 나이를 먹은 어머니 아버지일 것임을 잘 알고있다.
매우 건강하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사람 둘을 앞에 두고서 아직 엄마 아빠라 부르며 당신의 아이로 여전히 남고 싶어하는 건 꽤 지독한 이기심이다.
이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매해 마지막 날이 되면 그렇게 다짐을 하는데도 이렇게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면 그 다짐을 나도 장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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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펍에서 니튼이 나한테 물었다.
"이렇게 혼자 여행 다니는데 집에 제일 돌아가고 싶었던 날은 언제야?"
나는 잠깐 생각하고서 말했다.
"12월 31일. 딱 하루만이라도."
정말로 그랬다. 가족이 제일 보고 싶은 날. 매년 TV앞에 모여서 아빠의 생일과 새해를 축하하는 촛불을 같이 불었던 날. 한국을 떠난 후로 한 번도 이런 마음이 들었었던 적은 없었다.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다. 말도 안되는 애교를 부려가면서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잠시 누이고 싶다. 케이크를 노나 먹으면서 뻔하고 유치한 새해 덕담을 나누고 싶다. 올해는 다만 그러지 못해 조금 많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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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기 전 엄마가 말했다.
"언제와 아들 보고싶어"
"금방 돌아가요, 걱정마."
"너 돌아오면 우리 가족 짧게라도 여행가자. 가까운 일본이라도. 편하게 패키지로 다녀오자."
"패키지보다 그냥 우리가 계획짜서 가는게 더 재밌을텐데?"
"근데 너가 지금 바쁘잖아 여행다니느라. 계획같은거 알아보고 짤 사람이 없어."
"에이 왜 나 시간 많아! 내가 짤게."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새해 연초부터 꼭 해야할 일이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