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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May 28. 2019

시베리아 횡단열차 일기

[세계여행 Day 89]

 4일째 아침. 맞은 편 창문에서 얕게 밀려오는 아침 햇빛이 기분좋게 내 자리로 들어오고 있다. 대충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그새 꽤 많이 사라지고 없다. 새벽 사이에 노보시비르스크같은 큰 도시를 몇 개 지났는데 거기서 많이 내렸나보다. 눈엣가시같던 시끄러운 아저씨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기차 안에 있지만 지금은 자고있어 말이 없다. 열차에 타고 나서 이렇게 조용한 오전은 처음인 듯 하다.


 바로 앞 자리에 계신 아주머니는 벌써 일어나서 햄으로 아침을 드시고 계신다. 내 앞자리에 앉은 네 번째 승객이다. 처음엔 항상 신문을 보고 있어서 시사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시구나, 했었는데 알고보니 십자말풀이를 하고 계신다.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보따리에 신문지가 꽤 많아 보이는걸로 봐서 아마 다 그런 용도이지 싶다.

 나는 둘째날 아침에 리엔나 아주머니가 주신 감자스프와 햄을 먹은 걸 제외하고는 아침을 먹은 적이 없다. 일단 먹을 것도 부족하거니와, 내가 늦잠을 많이 자는 편이라 일어나면 벌써 점심때다. 지금 내가 가진 남은 식량은 컵라면 2개, 물 1리터, 작은 감자스프, 그리고 리엔나 아주머니가 남겨주고 가신 오이 하나다. 아껴 먹어야 한다.  


 멍한 정신으로 창밖을 본다. 중간 중간 서는 정차역을 제외하고는 며칠째 항상 똑같은 풍경이다. 눈으로 덮힌 온통 새하얀 평원에 침엽수와 자작나무가 두피에 꽃힌 머리카락들처럼 무수하다. 그만한 정도면 숲으로 보일만도 한데 그러기엔 눈 쌓인 평야가 너무 넓다. 여기에 햇빛이 비추는 모습이 참 좋다. 동이 틀 때, 한낮일 때, 해가 질 때 다 아름답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색깔도 이쁘다.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창밖으로 눈길이 가는 이유다. 누가 횡단열차에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들어보라고 해서 들어봤는데 세상에, 영화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못 씻은지 4일째다. 샤워는 사치다. 머리를 못감은건 당연하고 면도나 비누세수도 못해서 산유국을 건설했다. 겨우 양치 하는 게 전부다. 이따금씩 화장실을 갈 때면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웬 산적 한 명이 열차 안을 돌아다닌다. 여태까지는 내 인생에서 제일 못생겼을 때가 훈련병 시절 머리 빡빡 깎았을 땐 줄 알았는데, 내 착오였다. 지금 연일 기록 갱신 중이다. 이쯤되면 내가 지나갈 때마다 러시아 사람들이 날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열차 첫 날엔 한국인 몇 명 정도는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몰골을 생각하면 차라리 한국인이라도 없는 게 훨씬 낫다. 먼 시베리아 땅에서 아무리 고국 사람을 그리워한다해도 지금 모습을 보면 일단 도망갈테니.


 내일 또 하루 자고 일어나면 드디어 이 기차에서 내린다.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상 오늘이 열차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다. 그냥 책이나 읽고, 영화 한 편 보고, 밥때되면 두 개남은 컵라면 먹고 해야지.


오늘 하루도 "오친- 하라쇼(아주 좋아)!"


아침에 마시는 따뜻하고 달달한 차 한잔의 여유.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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