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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May 31. 2019

백일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세계여행 Day 101]

 “여행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음, 어제가 마침 백일이 되는 날이었으니까 오늘이 백한 번 째 날이네요.” 
 “네? 백 일일이요? 와 대단하시네요.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네 뭐,” 
 “한국은 언제 돌아가세요?” 
 “다음주에는 들어가려구요. 작년 연말에도 밖에 있었는데 설에는 가족이랑 있어야 될 거 같아서요. 엄마가 기다리다 지쳤대요.”  


알혼(Olkhon) 섬의 아름다운 설경이 마지막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한글을 보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낯선 공기와 풍경에 익숙해졌어요. 100번 해가 뜨고 100번 달이 지는 시간이 작은 단위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8,640,000 초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속으로 1초 2초 세어보면 고작 30초라는 시간도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하물며 864만 초는 얼마나 큰 숫자일까요.
 그 864만 초가 흐르는 동안 시침이 시계를 돈 횟수 만큼이나 저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많은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월 7일, 한국을 나온 지 정확히 100일이 되는 날 저는 블라디보스토크 행 횡단열차에 있었습니다. 그날 마셨던 두 잔의 커피 때문인지 아니면 열차를 타는 동안 바뀌어버린 시차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밤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취침등만 켜져있는 기차 안에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가방에서 몇 년 전에 썼던 다이어리를 꺼내 읽었습니다. 그때 썼던 생각들을 읽으니 지금과는 조금 다른 면이 나에게 있었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날계란처럼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속내가 열정으로 끓어 넘치던 여행을 거치면서, 완숙은 아니겠지만 반숙 정도의 삶은 계란처럼 익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짧았던 머리카락도 어느새 덥수룩하게 자라고, 꽤 새 것이었던 운동화도 꼬질꼬질해진 만큼이나요. 겉모습만큼 생각 머리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애초에 조금이라도 변하고 싶어서 떠나온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과 낯선 이국 땅은 ‘바뀔 수 있을까’ 의심을 ‘바뀔 수 밖에 없다’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가졌다는 걸 떠나와서 알게 됐네요.


 그런데


 신기하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변하지 않아 줘서 다행인 것이라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온 사람에겐 출발했던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는 떠나기 전 나를 환하게 배웅 해줬고, 그래서 나를 말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족, 친구, 나에게 종종 안부를 물어오고 응원을 해주는 많은 지인들까지. 너무 늦지 않게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여행자의 일 중 하나라고, 횡단열차 새벽에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하루키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쉽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다행이기도 한 이 여행의 막바지가 어떤 모습일지 저도 내심 궁금해집니다.


-


 “사람에게는 되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中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세 번은 완독한, 내가 애정한 책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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