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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Mar 19. 2020

단편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보편의 예술론을 말하는 단편 영화의 또 다른 방식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2019, 이연철 감독




* 이 작품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배우들(박종환, 임선우)이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 에피소드 별 남녀 주인공의 이름을 확인한 뒤 읽는 것이 편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 경수, 유진

두 번째 에피소드 : 민호, 은정

세 번째 에피소드 : 종구, 영주





 이 작품은 세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전체 러닝 타임은 28분이다. 다시 말해 각 에피소드당 10분도 안 되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각 에피소드마다 상황과 인물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모두 특정한 어떤 순간만을 다루고 있기에, 캐릭터의 성격을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좋은 점이 있다면 그 순간 자체만을 집중하기는 쉬울 것이고, 순서대로 본다면 커플의 ‘위기’, ‘행복’, ‘시작’으로 쉽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순간일 뿐이다. 분명 매 순간에서 갈등이, 그리고 의문이 존재한다. 첫 에피소드에서 경수(박종환)는 자신의 손에 왜 칼을 꽂은 걸까. 다행히 그가 손에 칼을 꽂은 순간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기에 관객은 일종의 ‘장르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들의 대화 내용 중 어떤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의 행위가 앞선 에피소드의 경수를 지칭하기 때문에 이 역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로써 두 에피소드는 이어지는 모양새를 하며, 우리는 각 에피소드를 독립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두 에피소드의 연결고리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의문은 또 하나가 발생한다. 민호(박종환)와 은정(임선우)의 대화에서 그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기에 서로의 의견에서 차이가 생기는지, 그리고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작품이 영화인지 문학인지 헷갈린다. 물론 덕분에 우리는 좀 더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문제가 하나 더 생긴다. 이것은 정말 ‘흥미로운 문제점’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다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연출의 몫이기도 하다.) 행복의 인과관계를 따질 수 없는 사랑의 순간에 함께 서 있는 듯한 두 배우의 연기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대사만 오롯이 집중하기 힘들다. 때문에,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정보들이 많이 나오는 대사에 집중이 안 되고, 28분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고서도 각 에피소드의 순간적인 모습들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다시 말해 사랑에 관한 짧은 세 개의 순간만 마주하고 나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각 에피소드를 통해 누구나 한 번씩 겪어 볼 만한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매번 다른 캐릭터와 다른 상황 그리고 달라 보이는 장소를 통해 독립적인 스타일은 만든다. 따라서 세 순간을 담았다는 방식에서는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정확히는 사랑 이야기의 변주라기보다는 그저 독립적인 세 이야기를 붙여놓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각 에피소드만의 매력을 너무 잘 살린 탓일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 전체를 보는 방식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것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기회를 마주하기 힘들다면, 그 책임 역시 이 영화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작품 전체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세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장점을 하나 우선 말한다면, 앞선 내용과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세 개의 이야기 중 유독 눈에 띄는 에피소드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세 이야기 모두 평면적이거나 매력이 없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만약 세 이야기 중에서 그게 완성도의 측면에서라도 좀 더 돌출된 이야기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그 하나의 이야기로만 기억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17년에 개봉한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시간대마다 다른 인물들과 다른 상황으로 네 가지 에피소드를 갖는 이 영화는 각 이야기마다 특성은 있지만, 공통점은 ‘카페’라는 장소일 뿐, 차이점이 많이 드러나며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때문에 영화 전체로서 기억되기보다는 각 에피소드의 취향이나 매력을 가지고 줄 세우기까지 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반면에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를 그렇게 보는 시선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세 에피소드 모두 다 같은 배우들을 담고 있어서도 있지만, 각 에피소드마다의 힘과 농도가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돌출되지 않는 에피소드 형식의 영화. 그 덕분에 우리는 한 번에 이어서 서로 다른 세 이야기를 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마주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방식이 이 영화를 좀 더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보이는 세 이야기에는 교집합이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속 민호와 은정이 함께 본 영화와 은정이 글로 쓴 소설이 각각 첫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이다. 게다가 첫 이야기에서 경수가 손을 칼로 찌른 흉터가 세 번째 이야기 속 종구(박종환)의 손에 등장하며 이 두 이야기마저 이어지는 모양새를 갖는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조적 측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는 사랑의 단계를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 캐릭터는 달라도 배우는 같기에 그 효과는 더 커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에 영주(임선우)가 종구의 손에 있는 흉터를 발견한다. 이 영화 속 세 이야기를 통상적인 연인의 시간순으로 둔다면 종구 손의 흉터는 아직 존재하지 않아야 할 흉터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역으로 이야기를 배치한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흉터라는 단서와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한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한 커플의 단계적인 모습뿐 아니라, 사랑이 끝난 뒤 또 다른 커플의 시작을 목격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매 에피소드는 그 단계적인 순간들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독립적인 매력과 인과관계적인 효과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이 주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갖는 것은 형식의 힘이지 이야기 자체가 갖는 힘은 아닐 수도 있으며,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설득력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도 느끼기 힘들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사랑의 이야기뿐인가.


출처 - 네이버 영화


 독립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들을 함께 묶어 한 작품으로 선보인다면, 이것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각 에피소드 개수만큼 있는 것으로 보이고, 각 이야기만의 특성이 각자의 돌출된 부분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특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경수가 손을 찌르는 순간 역시 영화의 전반에 배치되었기에 순간적인 장르적 효과는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감소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추측은 이 작품의 제목과 함께 더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매우 주관적인 방식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며, 이에 따라 하나의 의견으로 보시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이다.(띄어쓰기에 관한 내용까지 생각한다면 너무 수사학적 방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여, 이것에 대한 언급을 굳이 하지 않으려 한다.) 이때 이 제목과 관련된 행위를 하는 것을 어떤 ‘인물’인가. 아니, 함께 한다고 하니 정확히는 어떤 ‘인물들’인가. 분명 이들은 두 번째 이야기 속 민호와 은정이다. 행복한 일상 속에서 함께 영화나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 이때 두 사람의 직업이 정확하게 명시되지는 않지만 은정은 작가이며, 민호는 어떤 작품을 보고(그 영역은 영화로 보인다.) 리뷰나 비평 등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갈등이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이 두 사람은 한 작품을 보고 생각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어 잠시 논쟁의 순간을 갖는다. 은정은 창작의 영역에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어떤 작품 속에서 ‘경수’가 손을 찌르는 것을 보고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체가 갖는 매력이나 힘을 느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반면 민호는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직업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는 그러한 장면이 왜 들어갔으며, 왜 그 장면이 힘을 갖는지 그리고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 분명 이것은 창작자와 비평가의 차이로 보인다. 즉,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은정은 창작자의 자리에 있으며 민호는 비평가의 자리에 있다. 그리고 둘은 연인 관계이다. 어쩌면 두 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이연철 감독은 문학이나 영화라는 창작물을 사이에 두고, 창작자와 비평가의 관계를 연인의 모습을 통해 표현해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나머지 두 에피소드에서 역시 연인인 두 남녀가 나오며, 같은 배우인 박종환과 임선우가 연기하고 있다. 때문에 더 나아가 두 에피소드에서도 여성은 창작자, 남성은 비평가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첫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갈등 역시 흥미로워진다. 헤어짐에 이른 연인의 갈등, 이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던 창작자와 비평가의 관계가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와 같다. 그리고 아쉬운 쪽은 비평가의 입장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비평은 늘 창작이라는 존재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결국 비평의 영역에 서 있던 자는 무기력함에 빠지고 만다.(이와 함께 유진에게 자신을 칼로 찌르라던가, 스스로 손을 찍는 경수의 행동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두 번째 에피소드를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창작자와 비평가의 모습은 은정과 민호의 모습을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어떤 창작물을 굳이 따져가며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 창작물 자체가 가진 힘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비평의 영역은 그것을 명확한 이유와 함께 보는데, 때문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힘을 가졌다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를 보는 창작자는 그 방식을 나무란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못하니 답답해 보이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것은 일종의 논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화해의 순간, 창작물 자체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창작자의 영향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이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두 남녀의 위치에 있어서 여성이 더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고 느끼고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바로 세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세 번째 에피소드는 확실히 남자, 즉 종구가 주도하는 듯한 상황을 만들어 간다. 특히 종구가 직접 건물을 타고 빈집으로 들어가 안에서 영주에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부터가 그렇다. 문을 열어주는 종구, 그리고 원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들어가는 영주. 이때 이들의 대사를 상기해보면, 잠깐의 상황극과 함께 영주는 ‘여기 제집인데’라는 말을 한다. 이 역시 창작자와 비평가의 모습으로 본다면 적잖이 흥미로운 대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주와 종구의 에피소드에서 분명 그들이 들어간 집은 그들이 연인 관계가 될 계기가 되는 장소이다. 일종의 행복이 시작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공간은 사실 영주, 즉 창작자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종구, 비평가의 공간이 된 것이다. 결국 창작자 역시 비평가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역시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이기에. 그렇게 이 작품은 비평의 영역은 창작의 영역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창작물이 빛을 발하는 것은 비평가 또는 힘 있는 독자나 관객 없이는 힘들다는 사실을 한 사랑의 시작을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경수의 손에 났었을 상처를 종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비평의 영역은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또 다른 창작과 함께 다시 힘을 갖게 된다는, 일종의 희망 역시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수많은 영화에서 우리가 영화 또는 그 밖의 창작물들을 얼마나 잘못 즐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말하려는 모습을 보아왔다. 각자의 진심과 경험을 통해 말하는 것이겠지만, 거기에 정답은 없다. 창작물과 그것을 마주하는 이들은 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연인처럼.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는 이러한 거시적인 방식의 예술론을 우리의 가슴 뛰는 순간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다. 영화와 마주한 우리의 모습은 현재 어느 순간에 닿아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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